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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출처 - 왜 언론 매체에서 승려들에게만 님 자를 붙이죠?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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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 방송 등에서 승려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데요.
왜 유독 승려들에게만 xxx스님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 신부, 수녀, 주교, 추기경, 심지어 대통령에게도 언론상에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데....
제가 배우기로는 언론 매체상에서는 대신에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표기법이라고 배웠는데요....
올바른 표기를 선도해야 할 언론 매체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스님>이라는 표기를 쓰는
것을 보면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 같은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요?
(참고로 저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승려분들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전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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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도를 닦기 위해 고행인욕하며 공부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스님 또는 승려, 사미 그리고 중이란 단어를 혼용하여 쓰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스님이라는 말의 유래는 참으로 애매하기 그지없다. 혹자는 스님의 어원이 승려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건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면 역시 추측에 불과한 필자의 소견을 나름대로 기술하여 스님이라는 어원의 본래 근원에 좀더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도 그다지 틀렸다고 볼수는 없는 일 일것이다.



필자가 추측하고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스님의 어원은 본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산스크리트어로 도를 닦으러 돌아다니는 불가의 승려는 여러가지 용어로 불리우는데 그 가운데 "스와미"라는 용어가 있다. 불교는 후세 중국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중국의 당태종 시절에 삼장법사라는 사람이 서역에 건너가 불교경전을 공부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불교를 전하는 최초의 선교사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삼장법사 이후 불교의 용어는 본래 산스크리트어가 중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을 대거 수정하고 중국인들에게 쉽게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산스크리트어를 다시 중국어의 발음과 가장 흡사하며 그 가운데서 본래 산스크리트어의 의미에 가장 근접한 한자를 빌리려는 광범위하며 많은 노력을 거친 끝에 한자로 된 중국식 불경이 완성되게 된다.



이렇게 중국으로 건너온 불교는 다시 한국에 한자어로 된 경전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불경의 거의 절대 다수는 중국식 한자로 다시 태어난 불교 경전이다. 이때 중국에 같이 건너온 산스크리트 용어 가운데 스와미는 중국에서 "사미"라는 용어로 다시 거듭 태어나게 된다.



여기서 우리나라에 건너온 사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다지 활발하게 쓰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비단 중국의 불교만 수용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이후 서역으로 직접 건너가 그곳에서 인도 본래 불교의 진면목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집단이 더러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중국식 사미라는 단어보다 스와미라는 단어 시 본래 발음그대로 통일신라인들이나 고구려인 (고구려에서 불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들에게 쓰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와미라는 용어는 그후 오랜동안 한국인들에게 스와미라는 본토발음으로 쓰여져 오다가 우리식으로 편하게 발음이 와전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스님이라는 최종의 단어로 굳어져 버렸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시 말해 스님은 스와미라는 인도식 승려에 관한 용어가 변형되어 우리식의 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고구려시대에 중이라는 신분이 있었는데 이 중은 도(道)를 닦던 계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인들에게 불교가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최치원 선생이 우리 고유의 화랑도에 관해 언급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유불선(儒佛仙) 삼대사상이 모두 포함된..."



여기서 화랑도란 비단 신라인들 고유의 것이 아니라 단군 조선에서 부터 명맥이 이어져 온 우리 고유의 오랜 공부 방식이었으며 이 화랑도는 고구려인들에게도 명칭만 다른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로 면면히 계승되어져 왔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고구려에서는 서역에서 불교의 교리가 수입되기 전에 고구려인들에게 명칭만 다를뿐 같은 내용의 공부방식이 존재했었던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 증거로 고구려인들은 획기적이면서도 새로운 외부 사상인 불교를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천손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던 고구려인들은 같은 내용이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우리 고유의 유불선 삼대 정신을 모두 포함한, 불교사상, 즉 다시 말해 화랑도 사상에 더 강한 애착을 보인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인들이 중국에서 건너온 불교를 그다지 신봉하지 않았던 보다 근원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이라는 용어는 고구려인들이 고구려식의 화랑도를 연마하던 계층가운데 정신문화에 특히 치우쳐 공부하던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였다는 것이다.(고구려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가 부족한 고로 이 부분은 그냥 필자의 추측일 뿐이지만) 그러므로 중이란 말은 한자어가 아니고 우리 고유의 직업,또는 신분에 대한 명칭이라고 보면 되는데 후세에 불교가 한반도에 정착하고 난 이후에 중이란 신분에서 하는 일과 스와미, 즉 스님이 하는 일이 똑같기 때문에 후세에 동의어로 정착되어졌다.



결론적으로 중도 불교에서 온 단어가 아니며 스님도 중국에서 온 단어가 아니라 인도의 범어에서 온 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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