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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의 역사와 가치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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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阿含經)」의 역사와 가치 1

여기에 하나의 경의 집록(集錄)이 있다. 일찍이 중국의 譯經僧들은 그들을 번역하여 [阿含]이라 제목 붙였다. 그것은 그 집록의 原名「아가마」(Āgama)를 音譯한 것이다. 그 「아가마」라고 하는 것은 「到來한것」(coming)이라든가 「전하여 온 것」(anything handed down)이라는 정도의 의미의 말이고 그것에 의해 「傳來의 經」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 音寫로써는 이 외에도 「阿笈摩」라든가 「阿笈摩」등의 音寫도 보이지만 경의 제목으로는 「阿含」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들 集錄이 중국으로 도입되고 譯出된 것은 서기4세기 경부터 5세기의 전기에걸친 것이다. 이들의 現形과 그譯主와 번역연대를 열거하면 다음과같다.

(1)「中阿含經」60권 224경 譯主 僧伽提婆(Samghadeva) 譯出年代397-398

(2)「增一阿含經」51권 472경 譯主 僧伽提婆(Samghadeva) 譯出年代297

(3)「長阿含經」22권 30경 譯主 佛陀耶舍(Buddhayasas).竺佛念, 譯出年代413

(4)「雜阿含經」50권 1362경 譯主 求那跋陀羅(Gunabhadra) 譯出年代435

(그 외에 異譯으로써「別譯雜阿含經」16권 364경, 또는「雜阿含經」1권 27경 등이 존재한다.)

 이들에 의해 阿含部의 경전들이 집록으로서의 完譯을 얻은 것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그 후 이「아함」이라 칭해진 經典群이 중국에서 받은 대우는 몹시 부당한 것이엇다. 그리고 오랫동안 거의 완전히 중국의 영향하에 있어 왔던 한국의 불교역사에 있어서도 그 經典群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거의 마찬가지였다. 결국 중국과 한국의 불교에 있어서는 이「아함」이라 칭해진 經典群은 완전히 무시되어 읽히지도 연구된 일도 없이 지금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은 도대체 어째서일까? 유감스런 일이지만 우선 그것부터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와서 우리가 새삼스럽게 이「아함경」에 대하여 말해야만 하는 이유를 밝힐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국 이「아함경」이 소위 부파불교의 소승경전으로 오해되어 해석된 것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천태대사지의(天台大師智顗-597, 60歲寂)의 「5시의 敎判」이라는 것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天台敎儀」는 그 벽두에서 말한다.

「天台智顗大師, 以五時八敎, 判釋東流一代聖敎, 罄無不盡, 言五時者, 一華嚴時, 二鹿苑時, 三方等時, 四般若時, 五法華涅槃時, 是爲五時」(天台智顗大師는 오시팔교로써 동류일대의 聖敎를 해석하고 모든 진력을 다하여 노력하지 않음이 없다. 五時라는 것은 첫째로 화엄시, 둘째로 녹원시, 셋째로 방등시, 넷째로 반야시, 다섯째로 법화,열반시, 이것이 五時가 된다.)

 거기에는 중국 고대의 문헌 비판이 있다. 그것은「妙法蓮華經」제4품, 信解品에 설명된「궁자유(窮子喩)」에 의해 석존 一代의 설법을「五時」로 구분하는 사고 방법이다. 그것을 지금 상세하게 서굴할 것은 못되지만 대략의 개요를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1.화엄시(華嚴時) 37일「화엄경」을 설한다.

 2.녹원시(鹿苑時) 12년「四아함경」을 설한다.

 3.방등시(方等時) 8년「유마(維摩)」「승만(勝鬘」등 여러 大乘經을 설한다.

 4.반야시(般若時) 22년 여러 반야경을 설한다.

 5.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8년「법화경」을 설하고, 一日一夜로 하여「열반경」을 설한다.

 석존은 그 보리수 아래에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자 그대로 나무아래에서 37일동안 깨달은 그대로의 고원숭엄(高遠崇嚴)한 가르침을 설하셨다. 그것이「화엄경」의 내용이라고 확정하고, 하지만 세상의 무지하고 둔한 사람들은 전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라고 가정하고, 이것을 「화엄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석존은 그때부터 12년 동안은 계속 그 수준을 낮추어 둔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쉽게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설하셨다고 설명하고, 이것이 이「四아함」의 내용이고, 그 시기의 설법을 녹야원에서의 초전법륜(初傳法輪)에 연유해서「녹원시」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수준을 조금씩 높여 우선「유마경」「승만경」등의 여러 대승경전을 설하셨다고 구분하여, 그것을 지의(智顗)대사는 「方等時」라고 불렀다. 方은 넓다라는 뜻, 等은 평등의 뜻이고, 여러 大乘의 시기라는 정도의 뜻이다. 그 시기는 8년에 이른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22년에 걸쳐서는 여러「반야경」을 설하시고, 또 최후의 8년간에 걸쳐서는「법화경」을 설하시고, 게다가 一日一夜로하여「열반경」을 설하시고, 이로써 法身常住, 悉皆成佛의 이상을 밝히려 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시기가「반야시」이고, 또「법화.열반시」라고 법화경 우월 위주의 5시8교의 차별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지금 말하는「아함경」은 무지하고 둔한 사람을 위해 석존이 敎說의 수준을 내려 쉽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설하신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이「五時判敎」의 압도적인 영향아래 있었던 중국과 한국. 일본의 불교도들에 있어서는 이「아함」이라 칭해진 經典群이 거의 완전히 무시되어 독송되지도 연구되지도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이르러서 그토록 완강하던「五時의判敎」도 차츰 그 압도적인 영향력을 잃고 이제는 이미 그것을 재 고찰하게 되었다. 한편 이「아함」이라 칭해진 경전군이야 말로 근본불교 즉, 부처님 직설인 불교의 원초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료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천태지의 대사의 5시8교는 당시 상황에서 취해진 시대적 최고의 가치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밝혀둔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역사적 운명에 의한 것이었을까?


2

 그것은 결국 우리가 말하는 근대불교학의 새로운 전개에 의해 야기된 성과의 하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 근대불교학의 전모를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직접적으로 이 문제에 관하여는 두세 개의 내용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 첫째로서 우선 말 하고싶은 것은 이를테면 남전불교(南傳佛敎)와의 만남이다. 그때까지 우리의 불교는 소위 4국(四國) 전래(傳來)의 불교, 즉 인도,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불교이고, 이것은 지금 남전(南傳)에 대해 말하자면 北傳佛敎였다. 그리고 남전불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최근에 이르러 우리 불교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게된 것은 유럽의 동양학자들의 자극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업적에 대해서도 지금은 도저히 그 전모를 다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하나만 구체적인 사항을 들어보면, 1882년 리스.데이비스(T.W.Rhys.Davids), 하우스벨(H. Oldenberg)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파리聖典協會」가 성립되었다.

 처음 인도의 성립과정에서 먼저 받아들여진 언어는 산스크리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불교의 문헌에는 파리어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파리어 연구의 길이 크게 열리지 않고서는 인도불교 연구의 길은 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을 타개한 것이 「파리성전협회」에속한 학자들이고 그 이후부터 이 분야의 연구도 역시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그 협회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의 업적은 대충 다음의 3가지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파리原典의 校訂 간행, 파리 三藏, 즉 經, 律, 論 내의 經藏과 論藏이 협회 사업으로서 교정 간행되었다. 율장은 이미 올덴버그의「율장」(Vinaya- Pitakam: 5 Bde. 1879-1883)이 있었기때문에 협회의사업에 포함되지 않았다.

2. 파리聖典의 번역 간행, 경장과 논장 중에서 중요한 것이 차래로 영역(英譯)되어 출판되었다.

3. 파리어 사전(辭典)의 편찬 간행, 데이비스와 스테드(William Stede)협력으로 「巴英辭典」(1921-1925)이 편찬 간행되었다.

 하여간 그 같이하여 성립한 유럽 학자들에 의한 불교연구의 성과는 주로 파리어 성전에 그 자료를 의존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원시불교의 연구를 그 주류로 하게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스리랑카(Ceylon)소전인 파리 三藏은 「上座部」(Theravāds) 소속의 것이고 전혀 대승불교의 경전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유럽 학자들의 새로운 불교연구가 눈부신 성과를 얻음과 동시에 그들에 대하여 배운 한국, 일본 불교 연구자들도 점차 증가하여 이윽고 일본의 明治후반부터 한국, 일본의 불교연구는 원시불교 연구를 그 주류로 하게되고 완전히 그 면목을 새로이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파리 三藏 내의 경장, 즉 석존소설(釋尊所說)의 교법을 전하는 경전의 집록은 「五部」(Panca-nikāya)라 불려지고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배열되고 있다.

1.「장부경전(長部經典)」(디그하-니카야 Digha-nikaya) 34경

2.「중부경전(中部經典)」(마짐마-니카야 Majjhima-nikaya) 152경

3.「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상윳다-니카야 Samyutta-nikaya)56상응7762경

4.「증지부경전(增支部經典)」(앙윳다라-니카야Anguttara-nikaya)11集9557경

5.「소부경전(小部經典)」(쿠다카-니카야Khuddaka-nikya)15分

 우선, 이「파리 五部」의 표를 앞의「한역4아함(漢譯四阿含)」과 비교해본다면, 이 두 경전의 집록이 결코 관계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상세히 음미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a.「파리 五部」의 「장부경전」과「漢譯四阿含」의「장아함경」과는 그 경의 수도 거의 동일하고 각각의 내용도 대부분 일치한다.

b.「파리 五部」의「중부경전」과「한역4아함」의「중아함경」과는 이것 역시 경 수도 거의 동일하고 내용도 대부분 일치한다.

c.「파리 五部」의 「상응부경전」과 「한역4아함」의「잡아함경」과는 언 듯 보아서는 같은 집록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명칭도 다르고 경 소도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잡아함경」은 가끔「상응아함」이라 불려지는 경우가 있다. 또 그 경 수는 상당히 다르지만 주요되는 경은 거의 일치하는 것이 많고 그 경 수의 차이는 결국 後代에서의 변화와 증대에 의한 것이라 짐작된다.

d.「파리 五部」의「증지부경전」과「하역4아함」의「증일아함경」과는 우선 그 경의 제목이 같은 집록임을 이야기하고 있다.「增支(aṅguttara)도「增一」(ekottara)도 모두 수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즉 1부터 차례로 수를 더하여 11에 이르기까지의 숫자를 기준으로 해서 그것에 의해 여러 경을 분류하는 것이 이「증지부경전」,「증일아함경」의 편집 형식이다. 그 경 수가 지나치게 차이가 있는것은「증지부경전」에서의숫자 셈방법의 특수성에 의한것이많다.

e.「파리 五部」의「소부경전」은 앞의 四部 이외의 다양한 경이 집록딘 것이고「파리 五部」중에서는 가장 뒤의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소부경전」에 해당하는 것은 한역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四分律」과「五分律」에서 보여지는 결집의 서술 중에「雜藏(잡장)」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소부경전」에 포함된 약간의 경은 한역의 藏經(장경)속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그들이 일정 형식 아래서 하나의 경전군으로서 정돈된 것을 한역에서는 끝내 볼 수 없었다.

 결국 이「파리 五部」중 최소한 四部는 앞의「한역4아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같은 계보에 연결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 원형의 성립에 대해서도 충분히 믿을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파리 三藏「파리 五部」와 병행하는 문헌으로서「律藏(율장)」(Vinaya-

pitaka)을 가진다. 그「파리율장」안에는 그「소품」(Cuiia-vagga)의 하나하나에 「五百(결집)健度」(Pancasatik akkhandhaka)인 一章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제1결집의 소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우선 그 결집의 동기로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말한다.

 석존이 구시나라(拘尸那羅)의 교외에서 般涅槃하시고 잠시후의 일, 석존의 일행보다 조금 늦게 길을 나선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일행은 맞은편에서 오는 한사람의 외도에 의해 석존의 부음을 알았다. 그들의 놀라움과 슬픔은 컸다. 그런데 그 일행중에 나이든 비구가 큰소리로 생각지도 못할 폭언을 했다고 한다.

 “친구여, 근심하지말고 슬퍼하지 말지어다. 우리 이제야말로 그 大沙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大沙門은 ‘이것은 너희에게 걸맞지 않다.’라고 우리를 괴롭혔지만, 이제 우리는 원하는 것은 행하고 원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그때 마하가섭은 잠자코 그것을 듣고 있었지만 석존의 유해의 뒤처리 등이 끝났을 때 곧 그는 동료 비구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친구여, 우리는 알맞게 敎法과 戒律을 결집해서 非法이 흥하여 正法이 쇠퇴하고, 非律이 흥하여 正律이 쇠퇴하고, 非法을 설하는 것이 강해지고, 正法을 설하는 것이 약해지고, 非律을 설하는 것이 강해지고, 正律을 설하는 것이 약해지는 때를 대비해야 되지 않을까! 그러한 대비밖에는 다른 것이 없다. 머지않아 바른 敎法이 흐트러지고 바른 계율이 쇠퇴하는 때가 올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에 앞서서 바른 교법과 계율을 결집하여야할 것이 아닌가.”라고 제시한 것이다. 그들은 즉각 그 제시에 찬성하였다.

 “그렇다면 大德長老여 결집을 위하여 비구를 선택하게나.”

 결집을 위한 비구의 천거가 마하가섭에게 위탁된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율장의 문헌을 떠나 「結集」(sangaha)이라는 것을 조금 설명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현대용어로 말하면 결국 성전 편집을 위한 집회이지만, 그 편집의 실재는 현대의 편집방법과는 완전히 다르고 그 내용은「合誦(합송)」(sangiti)임에틀림없다. 때문에 이제1결집은 종종「제1합송」이라 불려진 것이다.  그러면 편집의 집회 즉 합송은 어떻게 운용되었을까? 그것도 역시 그 율장의 기록에 의해서 아주 상세히 알 수 있다.

 먼저 마하가섭에 의해 선택된 五百人의 비구들은 잇따라 속속 마가다의 도읍 라자가하[王舍城]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집회는 성밖의 비바라(毘婆羅) 산허리에 있는 절에서 거행되었다.

 그 집회에서는 마하가섭이 首座에올라 우선 두 사람의 인물을 선택하였다. 그 한 명은 아난다(阿難) 존자였다. 그는 오랫동안 석존의 시중을 들어온 인물이고 스승이 어디에서 어떤 교법을 설하셨는지는 당연히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교법의 합송에 대해서는 그가 송출자(誦出者)로 선발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우바리(優婆離) 존자였다. 그는 계율을 지키는데 있어서는 가장 엄숙하고 합당하였기에 계율의 합송에 대해서는 그가 송출자로 선발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집의 일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먼저 首座에오른 마하가섭이 늘어선 오백 비구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승가(僧家)여 듣게나, 만약 승가가 좋다면 제일먼저 우바리 존자에게 율을 묻겠다.” 그러자 좌중은 침묵한다. 침묵은 승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바리가 말한다.

 “승가여 듣게나, 만약 승가가 좋다면 그대 長老 마하가섭이 율을 무름에 답하겠다.” 또좌중은 침묵한다. 그래서 마하가섭이 우바리에게 물어 말한다. “친구 우바리여 제일의 빠라지카(重禁罪,parajika)는어디에서 정해진것인가?”

“大德이여 비사리(毘舍離)에서입니다.”

“누구에게 연유되어서인가?”

“수딘나. 카란다붓다(須提那迦蘭陀子)에 연유되어서입니다.”

“어떤 것에 대하여 인가?”

“不淨法에 대하여입니다.”

이같이해서 마하가섭은 모든 율에대하여 묻고, 우바리는 그것에따라 답했다.

뒤이어 마하가섭은 좌중의 비구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승가여 듣게나, 만약 승가가 좋다면 그대 아난 존자에게 법을 묻겠다.”

계속해서 아난도 말했다.

“승가여 듣게나, 만약 승가가 좋다면 그대 長老 마하가섭이 법을 무름에 대하여 답하겠다.”

그리고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물어 말한다.

“친구 아난이여,「梵網經(범망경)」(Brahmajaia-sutta)은 어느곳에서 설해진 것인가?”

“大德이여, 그것은 라자가하[王舍城]와 나란다(那蘭陀)의 중간인 암파랏티카(菴婆羅樹林)안 왕의 별저(別邸)에서입니다.”

“누구에게 연유되어서인가?”

“遊行者인 수피야(須卑)와 그 제자인 부라하닷타(梵摩達)에 연유해서입니다.”

이 같이 해서 마하가섭은 모든 법에묻고 아난다는 그 물음에 따라서 답했다.

그같은 질문과 답이 차례로 되풀이된다. 그것을 비구들은 꼼짝않고 귀 기우려 듣는다. 그리고 바른 것이라고 확인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다시 한번 아니, 두 번 우바리가 또는 아난다가 리드하면서 모두가 합송 한다. 합송에 의해 모두가 그것을 통일한 형식에 의해 동일한 내용을 각각 자기의 기억 속에 확실하게 새겨 넣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 결집의 준비는 때때로「합송」이라 불려진 것이고 또 거기에 모인 비구가 오백명 이기 때문에 그것을 「五百結集」이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렇게 석가세존이 설하여 전하신 교법과 율장은 입멸 후 처음 1년 동안 합송 되어 확립되었다. 그것이 석가세존이 남긴 제자들의 최초의 사업이고 그 교법이 결집된 것이「五部」라는 것이다.


4.

 지금 반대로 漢譯經典을 열어보면 거기에는 이「파리율장」해당하는 것으로 古來에「四律」로 불려진 것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그 譯出연대, 번역자, 소속 부파를 붙여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五分律」미사세부화혜(彌沙塞部和醯) 오분율 30권

   역출 景平2년(424)

   역주 佛陀升(Buddhajiva, 423渡來)

   소속 化地部(Mahisasaka)

2).「四分律」 60권

   역출 弘始10년 (408)

   역주 佛陀耶舍(Buddhaysas, 408渡來)

   소속 法藏部(Dharmagupta)

3).「十誦律(십송율)」61권

   역출 弘始年間(401-413)

   역주 弗若多羅(Punyatara, 弘始年間來住)

   소속 薩婆多部(Sarvastivada)

4).「摩訶僧祗律(마가승지율)」40권

   역출 義熙(의희)10년 (418)

   역주 佛陀跋陀羅(Buddhabhadra, 406渡來)

   소속 大衆部(Mahasamghika)

 이들도 앞의「한역사아함」의 번역에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고 모두 서기 5세기 초기에 이미 역출 되어 있었지만, 그 중「마가승지율」의 한 권을 제외한 다른 세 권은 각각「파리율장」의 「五百結集犍度」에 해당하는 장(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서술은 제1결집의 동기와 人的구성, 시기와 장소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점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결집된 것이「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 잡장」이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雜藏(잡장)」이라는 것은 「파리오부」내의「소부경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한역에서는 일정 형식을 가진 하나의 경전군으로서 정리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 같이해서 우리는 지금 오래되고 원본적인 또 새로운 자료앞에 서있다. 그리고 우리는 석가세존 敎說의 眞相에 의문을 가지려한다면 우성 이「한역사아함」또는「파리오부」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감히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의 자료도 역시 그 원작의 진상에 의문을 가지려함에 있어서는 우선 엄밀한 문헌비판이 행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이미 말한바와 같이 이제는 그들의 견전집록이 그「제1결집」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의 경전 집록이야말로 확실히「아가마」(Agama,阿含) 즉 부처님 가르침의 「전래의경」이다. 하지만 그 때에 집록되어 성립한 것이 그대로 지금 보는 것과같은 방대한 경전군을 이룬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 때에 편집된 것은 어디까지나 현형(現形)의 경전군의 기초를 이룬 것이고, 그 사이에는 수 많은 변화, 증대, 부가가 있었고 혹은 재편집되어 현재 보는 것과 같은 「하역사아함」이 되고 「파리오부」가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이미 앞의 표로 보인 것과 같이「한역사아함」이 내장한 경의 수는 2479경에 달한다. 또「파리오부」가 包有하는 경수는 「소부경전」의 15분을 제외하고도 17505경에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제1결집」은 약 7개월만에 끝났다고 한다. 그 기간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율의 합송을 행하면서 또 교법을 송출하고 음미하고 합송할 수 있었던 경의 수는 모두 얼마에 달했던 것일까? 다양한 경우를 가정하면서 계산해 본다고 하드라도 아무리해도 그 같은 방대한 경 수를 산출해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결국 그 사이에 수많은 변화, 증대, 부가, 혹은 재편집이 행해진 것을 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문헌 비판과 결론에 대하여 조금만 더 서술해 보고자한다. (조용길편저, 아함성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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