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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스출처 - 학눌 효봉스님은 어떤분이셨나요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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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태어났다. 수안遂安 이씨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김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에서 3남으로 출생, 이름을 찬형燦亨이라고 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스물 여섯 살에 졸업하고 귀국한 뒤 서른 여섯 살때까지 10년간(1913~1923) 법조계에 투신했다. 서울과 함흥 등지의 지방법원으로, 평양의 고등법원에서 법관으로 종사. 1923년 나이 서른 여섯 살 때, 법조계에 몸을 담은 지 10년째 되던 해 판사 이찬형은 최초로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날 몇밤을 뜬눈으로 지새면서 자기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인간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고뇌한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마침내 이런 결심에 이르자 이내 집을 뛰쳐나온다. '고뇌의 집'에서 뛰쳐나온 서른 여섯의 찬형은 이때부터 3년 동안 엿판하나를 메고 명산대천 팔도강산을 북에서 남으로, 혹은 동에서 서로 종횡무진 유랑생활을 한다. 이와 같은 유랑생활은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요 속죄와 참회의 길이었다. 그리고 또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세계를 찾아 헤맨 구도의 행각이기도 했다.

3년을 두고 정처없이 헤매던 나그네의 발길은 1925년 여름 마침내 금강산에 이른다. 전에도 몇차례 와 본 적이 있는 금강산이지만, 참회와 속죄의 나그네로 찾아든 금강산은 전에 없이 그의 마음에 새로운 각오를 안겨주었다. 출가 수도인이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치솟았다. 이래서 금강산을 가리켜 불가에서는 흔히 '발심發心의 산'?이라고 한다. 유점사에 들러 가르침을 받을만한 스승을 찾으니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에 석두石頭스님이 계시다고 했다. 석두스님은 '금강산 도인'으로 알려진 선지식이었다. 그 길로 하룻길이 창창한 신계사 보운암을 찾아갔다. 그때 큰방에 스님 세분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큰절을 하고 나서 말씀드렸다.

"석두스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그 중 풍채가 좋은 한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고?"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몇 걸음에 왔는고?"
하고 다그쳐 물었다.

젊은 방랑자는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바퀴 빙 돌고 앉으면서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석두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곁에 앉아 있던 스님들은 껄껄 웃으면서 "십년 공부한 수좌首座(선승)보다 낫다"라고 감탄하였다. 이날로 삭발, 석두스님으로부터 오계五戒(사미계)를 받고 법명을 원명이라 불렀다. 학눌學訥이란 법명은 뒷날 보조국사 지눌의 수학과 덕화를 본받아 배우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고, 효봉曉峰은 송광사 삼일암 조실祖室로 계실 때 지은 법호다. 스님이 나이 서른 여덟에 비로소 출가 수행승이 된 것이다.

 

서른 여덟에 5계를 받고 중이 된다는 것은 불가에서 흔히 말하는 '늦깎이'이다. 스님은 남보다 늦게 출가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남들이 쉴 때도 쉬지 않고 잠잘 시간에도 자지 않으면서 분발, 깨달음을 위한 좌선에만 전념했다.

보운암에서 그해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나서 이듬해 여름에는 여러 곳의 선지식을 친견하기 위해 행각의 길에 나선다. 소문을 듣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남쪽으로는 통도사 내원암, 북으로는 수월스님을 찾아 간도지방까지 두루 찾아다닌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이 집안(불가)수행의 일은 남의 말에 팔릴게 아니라, 내 자신이 실지로 참구參究하여 실답게 깨달아야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그 이듬해 다시 인연의 보금자리 금강산으로 돌아온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안거安居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정진대중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는 반야般若(지혜)에 인연이 엷은 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入禪과 방선放禪, 경행經行(방선 끝에 피로를 풀기 위해 거니는일)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와같이 대중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철(석달)동안 남들이 꺼리는 하판(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엉덩이에 무엇인가 달라붙는 것이 있어 뒤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흘러 중의와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 일념에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법을 위해 몸을 버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진이었다.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정진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정진하고, 오후에는 먹지 않았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해서 이때부터'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수좌란 뜻은 '능히 오욕을 끊으므로 우두머리라 하고(能斷五欲謂之首), 우뚝하여 움직이지 않으므로 자리라 한다(如如不動謂之座)'에서 온 것이다.

중이 된 지 다섯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속세의 업장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서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생각 끝에 토굴을 하나 짓기로 했다. 곳은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 구조는 단칸방, 한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햇볕과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바르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 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암자와 토굴과의 거래는 하루 한끼씩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주는 일, 그 전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도 없는 토굴 안의 동정을 밖에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있는 걸보고 살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 이와같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철도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덧 새봄도 지나갔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토굴벽이 무너졌다. 1년6개월만에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바가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무수한 수행자들이 오로지 ?이 일?을 위해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정진을 한다.

그때의 심경을 스님은 글로 읊었다. 이른바 오도송. 마흔 네 살 때의 일.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1932년 4월초파일 유점사에서 동선東宣화상을 계사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를 받았다. 마흔 다섯 살 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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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의 봉정암, 오대산의 상원사, 태백산의 정암사 등은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도 유명하지만, 그 당시는 청정한 선원으로 알려져 있어 선승들이 모여 착실히 정진하던 도량이다. 스님은 1935년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한철씩 이곳에서 정진한다. 오대산에서는 조실인 한암漢岩화상으로부터 포운泡雲이라는 호와 함께 다음같은 게문偈文을 받는다.

망망한 큰 바다의 물거품이요
적적한 깊은 산봉우리 구름이여
이것이 우리 집의 다함없는 보배
시원스레 오늘 그대에게 주노라
茫茫大海水中泡
寂寂深山峰頂雲
此是吾家無盡寶
灑然今日持贈君

1937년 스님의 나이 쉰 살이 되던 해 운수의 발길은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게 된다. 송광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벌여 기울어가던 고려불교를 다시 일으킨 유서깊은 승보의 도량이다. 스님은 선원인 삼일암에서 조실로 10년을 머물면서 수많은 후학들의 눈을 밝혀주고 길을 열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정혜쌍수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이 형성된다.

스님 자신이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을 갖추 닦았고 후학들에게도 이를 적극 권장하였다. 어록 중에서 이에 대한 스님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만약 이 일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고, 역대 조사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천하 선지식도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이 문이란 계율과 선정과 지혜의 삼학을 가리킴이다. 이 삼학을 집짓는 데 비유하자면, 계율은 집터요, 선정은 자재이며, 지혜는 기술이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더라도 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자재가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삼학은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함께 닦아 쉬지 않으면 마침내 정각을 이루게 될 것이다."

8ㆍ15광복으로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게 되자 불교계도 인재양성을 절감, 해인사에 출가수행승의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을 개설한다. 방장화상으로 스님이 추대됨에 따라 10년 동안 정들었던 조계산을 떠나게 된다. 1946년 가을의 일. 가야총림은 1946년 겨울 안거부터 1950년 여름 6?25사변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동안, 한국불교 수행승의 모범도량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근래 한국 고승들의 젊은 시절의 요람이었고, 뒷날 교단 정화운동의 역군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착실하게 수도하던 인재들이다.

1950년 겨울 가야산에 더 머물 형편이 못되어 부산동래에 있는 금정선원으로 옮겨와 안거. 그 이듬해 여름부터 1954년 3월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과 용화사 뒤 토굴에서 안거. 그리고 그해 여름철부터는 같은 미륵산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세우고 한거閑居한다.

1954년 8월 교단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자 여기에 참여, 55년 9월까지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머문다. 195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지리산 쌍계사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모셔진 탑전에서 안거. 예순 여섯 살 때의 일. 그 후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어 팔공산 동화사 금당에 주석,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1966년 5월 중순까지 이곳에 머물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5월 중순까지 이곳에 머물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긴다.

1966년 10월 15일(음력으로는 9월 초이틀) 다음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일흔 아홉의 생애를 마친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五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間今日事
月印於千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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