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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출처 - 개성에 남아있는 문화재의 특징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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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개성은 서울에서 약 70킬로미터 떨어져있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천안보다도 가까운 곳이다. 그렇지만 남한의 보통사람들은 아직 갈 수 없는 곳이다. 개성은 북쪽의 천마산․국사봉․제석산, 동북쪽의 화장산, 동남쪽의 진봉산, 서북쪽의 만수산 등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인데, 고려시기에는 북쪽의 송악산(488m)으로부터 남쪽의 용수산(177m)으로 연결되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나성(羅城)을 쌓았다. 개성의 서쪽으로는 예성강이 황해로 흐르며, 동쪽의 임진강과 동남쪽의 사천은 한강하류와 만나서 역시 황해로 흘러나간다. 이들 개성을 둘러싸고 흐르는 강은 국내 전역은 물론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좋은 해상수송로였으며, 예성강 하류에 위치한 벽란도는 해상수송로의 정점에 있는 국제 무역항이었다. 개성 주위에는 예성강 사천강 임진강 한강 유역에 넓은 농경지가 있어서 경제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개성은 지리적으로 산으로 둘러 쌓여 방어에 유리하였고, 편리한 해상 교통로를 가졌으며, 비교적 풍부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어서 한 나라의 수도로 적합하였다.
개성은 919년에 고려왕조의 서울로 자리잡은 이후 강화로 수도를 옮겼던 30여년을 제외한 400여년 동안 고려왕조의 서울이었다. 개경은 정치의 주무대였고, 국가 경제운용의 중심지인 동시에 생활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고려왕조가 망한 후 일반인들은 개성이 고려왕조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갔다.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개성은 조선시기 이후의 개성상인이나 개성인삼으로 더 친숙한 곳인지도 모른다. 이와 함께 개성의 고려시기 문화재 역시 거의 방치된 상태였다. 일제강점기 고유섭에 의해서 개성의 고적이 정리된 이후(고유섭, 1977 『송도의 고적』 열화당 ; 1945 『송도고적』) 최근까지 개성의 문화재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정리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런 가운데 작년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급기야 주식회사 현대아산이 개성주변에 공단을 조성하고 관광사업을 하기로 북한과 합의하게 되면서 개성은 잊혀진 도시에서 각광받는 도시로 떠올랐다.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남북경제협력의 시금석으로서, 한편으로는 보존해야할 역사도시로서 개성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글에서는 개성과 주변의 주요 문화재를 역사도시 개경의 구조와 연관지어 소개함으로써 개성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그렇지만 한번도 직접 보지 못한 채 단편적인 자료에 의지하여 개성의 문화재에 대해서 정리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짓는 집만도 못할지 모른다. 결국 제대로 된 집을 짓는 것은 숙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2.  개성의 문화재 현황
개성 일대는 오랜 기간 동안 고려왕조의 수도였기 때문에 많은 고려시기 문화재가 분포한다. 즉 개성 일대에는 나성 발어참성 내성 등 성곽, 만월대 등 궁궐터, 수많은 왕릉, 절터, 관청터 등 유적지가 널려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문화재 종합목록이 없기 때문에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최근까지 문화재관리국에서 간행한 북한 문화재 관련 서적을 토대로 추정하면 개성주변의 문화재는 릉 31, 기타 분묘 20, 성(곽) 19, 궁터 8, 절터 53, 탑 8, 부도․비 6, 불상 1, 당간지주 2, 정각 8, 서원향교 3, 가마터 1, 기타유적 33건으로 모두 193건에 이르며, 이 중 상당수는 고려시기의 것이다. 이것은 체계적인 종합목록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성과 개성주변의 문화재의 대체적인 추세는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현재 개성의 문화재 전체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개성의 문화재 중 북한에서 지정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문화재를 국보급, 보물급, 사적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1984년까지 국보급은 50, 보물급은 53, 사적은 73 등 모두 176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그 중 국보급이 개성남대문(34), 불일사5층탑(35), 선죽교(36),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공민왕릉과 정릉(39),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 등 8개, 보물급이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10개, 사적이 나성(46), 반월성(47), 만월대(48), 고려첨성대(49), 성균관(50), 숭양서원(51), 대흥산성(52), 현릉(53), 7릉(54) 등 9개로 모두 27개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다. 지정문화재는 대부분 고려시기의 것이며, 문화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 성곽과 문루
성곽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과 내부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흙이나 돌로 높이 쌓아올린 큰 담이다. 개성의 대표적인 성으로는 사적으로 지정된 나성, 반월성(내성), 대흥산성, 지정되지 않은 발어참성터가 있다. 그 중 고려시기 개성을 상징하는 성곽은 사적 46호로 지정되어 있는 나성이다. 나성은 고려 건국 후 약 100년 정도 후인 1020년(현종 11)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추진되어 1029년에 완성되었다. 둘레는 약 23킬로미터로 조선시기 한양 도성의 18킬로미터보다 더 길다. 본래 나성은 흙으로 쌓았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25개의 성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 4대문은 동쪽의 숭인문과 서쪽의 선의문, 남쪽의 회빈문과 북쪽의 태화문(북성문)이었다. 나성에 성문이 많은 것 역시 조선시대 한양의 도성과 다른 점인데,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나성의 성문은 하나도 없으며, 북창문과 북소문 등 내성(반월성)과 겹치는 부분의 일부 성문이  누각 없이 돌문만 남아있다.
나성이 만들어지기 이전 발어참성과 황성이 확인된다. 발어참성은 896년 후고구려 때 송악산 기슭에 쌓은 것으로 898년 후고구려가 개성을 수도로 삼으면서 도성의 기능을 하였으며, 고려 건국후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광화문을 비롯한 20개의 황성문이 확인되지만 역시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황성은 현종 초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후 나성이 축성되면서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남아있는 발어참성터는 황성의 동쪽 정문인 광화문 근처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한편 개성에는 사적 47호로 지정된 반월성 곧 내성이 있는데, 1393년(조선 태조 2)에 완성되었다. 이 성곽이 축성된 것은 당시의 국력으로 규모가 큰 나성을 방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내성의 규모는 둘레가 11.2킬로미터로 나성의 반 정도였다. 황성과 나성이 토성인 것과 달리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었다. 내성의 북쪽과 서쪽 면은 나성 성벽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그 겹치는 나성의 서쪽과 북쪽의 일부 성벽은 석성으로 남아있다. 내성에는 본래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문루가 복원되어 남아있는 것은 남대문 하나이며, 서쪽의 눌리문 등은 돌문만 일부 남아있다.
지금 개성 문화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남대문은 개성시 북안동에 있다. 이 곳은 개성의 중심지인데, 고려시기 개경의 중심도로인 십자로가 지나갔다. 남대문은 내성이 완성되는 해인 1393년에 완성되었고, 한국전쟁 때 완전 파괴되었다가 1955년에 복원하였다. 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안팍 3포의 합각식 건물로 되어 있다. 남대문의 현판은 조선전기의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남대문 문루에는 보물급 30호로 지정된 연복사종이 걸려있다. 연복사종은 1346년(충목왕 2)에 만들어져 연복사에 걸렸는데, 조선 중기 연복사가 화재로 없어지자 근처의 남대문에 옮겨 달았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복사종은 우리나라 5대 종의 하나로 일컬어지는데, 모양과 무늬 등이 다른 것과 다르다. 종의 몸체는 여러 줄의 굵은 선으로 아래 위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으며, 불상과 불경 및 여러 가지 문양과 종 이름 등이 새겨져있다. 연복사는 본래 919년 고려 태조가 수도를 철원에서 개성으로 옮긴 후 도내에 창건한 10찰 중의 하나였다. 선종 사찰인 연복사의 당시 이름은 보제사였으며, 위치는 남대문보다 조금 남쪽에 있었다. 조선시기에 유람객이 개성에 오면 연복사에 가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5층층각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 도성을 굽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연복사가 불에 타 없어진 이후 연복사종이 걸린 남대문이 대신 개성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망루 기능을 하였는데, 조서시기에 남대문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연복사탑이 보였다고 한다.
개성의 성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적 52호로 지적된 대흥산성이다. 대흥산성은 개성의 배후산성으로 조선시기 한양의 북한산성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처음 축성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대흥산성은 천마산과 성거산의 골짜기를 끼고 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10.1킬로미터이다. 이 곳에는 4개의 큰 문과 사이문이 있는데 그 중 북문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그리고 대흥산성에는 대흥사와 관음사가 있는데, 그 중 관음사는 보물급 3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외에도 개성의 동남쪽에 흥왕리성지, 덕물산성지, 덕수리성지 등의 성터가 남아있다.
 
4. 만월대와 성균관
뭐니뭐니해도 개성의 핵심 문화재는 궁궐이 되어야 한다. 궁궐은 왕과 왕실의 거처이자 정치와 행정이 행해지던 곳, 곧 나라의 최고 관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의 문화재는 알맹이가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궁궐이 남아있지 못하고 터만 있기 때문이다. 고려의 궁궐터를 흔히 만월대라 하는데, 사적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의 본대궐인 만월대 궁궐은 황성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궁성 안에 있었다. 이것은 북쪽의 송악산을 배경으로 그 남쪽의 구릉지대에 전개되어 있다.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이 대체로 평지에 건설된 것과 달리 흙을 높이 돋아 석축을 한 언덕진 곳에 자리잡은 것이 만월대 궁궐의 특징이다. 이것은 이른바 ‘지기(地氣)’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의지와 관련시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궁전 중심부의 건축적 위용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성의 남문인 주작문을 지나고 궁성의 남문인 승평문을 들어서면 구정이 나오고, 구정을 지나면 다시 신봉문이 나오며, 신봉문을 지나면 본대궐의 중심전각인 회경전의 문인 창합문이 나오며, 회경전은 4개의 33단 돌계단 위에 놓여졌다. 궁성 안에는 중심전각인 회경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각과 관청들이 널려있었지만, 지금은 신봉문터, 창합문터, 회경전터, 장화전터, 중관전터의 주춧돌이 풀 숲에 누워 전각이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만월대 법궁은 919년(태조 2)에 건설된 이후 현종대의 거란 침입, 인종대 이자겸의 난, 고종대 몽고 침입 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고,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 때 불에 탄 후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궁궐이 불에 탄 것은 1362년(공민왕 11)인데, 그 후 만월대 궁궐은 재건되지 않았다. 공민왕은 1365년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수년간 많은 물자와 노동력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정릉 조성공사를 벌이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불에 타 폐허가 된 궁궐은 손볼 겨를이 없었음에도 왕후의 추모사업에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공민왕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고려 본 대궐터는 원천석이 조선초에 ‘세월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라고 묘사하였듯이 이미 풀숲에 묻혀있었다. 조선시기에 이곳의 너른 마당이 여러 행사 장소로 이용되었음은 조선후기 김홍도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개성역사박물관에는 만월대 궁궐의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문경에 개경궁궐을 만들어 놓고 역사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하고 있다. 그리고 만월대 서북쪽에는 사적 49호로 지정된 고려첨성대가 있다. 이것은 고려시기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축대부분만 남아있다.
만월대 법궁 외에도 많은 이궁의 이름이 전하지만 현재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많지 않다. 공민왕 후반 이후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즉위하였던 수창궁과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에 살았던 경덕궁(목청전)은 그 터가 남아있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다.
고려시기 개경에는 많은 관청이 있었지만 지금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적 50호로 지정된 성균관뿐이다. 지금 성균관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다. 이 곳은 본래 문종대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었는데, 순천관 숭문관 등으로 변천되어 오다가 1310년(충선왕 2) 성균관으로 중영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이곳에는 고려에 성리학을 전한 안향이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여러 현인들의 인물상이 있다. 현재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균관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들이 모여있다.
 
5. 왕릉, 무덤
개성시를 중심으로 개풍군 판문군 일대에는 고려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의 무덤이 많다. 왕릉의 경우, 강화에 있는 2기(희종 석릉, 고종 홍릉)와 위치가 확실하지 않은 3기(우왕 창왕 공양왕)를 제외한 29기가 개성 일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왕릉 중 위치가 확인되는 것은 강화의 2기를 포함하여 모두 19기에 불과하며, 북한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보급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玄陵; 정릉 포함)과 사적 53호로 지정된 태조 현릉(顯陵), 54호로 지정된 고려 7릉군뿐이다.(장호수, 2000, ⌈개성지역 고려왕릉⌋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 혜안)
개성에 있는 고려 왕릉의 무덤구역은 크게 네 단으로 나누어 돌계단으로 연결하였다. 첫째단에는 봉분과 그 둘레에 돌짐승을 두고 앞에는 좌우로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을 두루고 병풍석 주위로 1미터 정도 밖에는 돌난간을 세웠다. 돌난간 밖에는 4 방위에 돌짐승상을 두기도 한다. 태조 왕건릉, 공민왕릉의 병풍석에는 각 방위에 따라서 12지상을 새겼다. 둘째단에는 정면에 장명등을 세우고 그 좌우에 문관상을 세웠으며, 셋째단에는 무관상을 세웠다. 초기왕릉에는 문관상만 배치되었지만, 후기 왕릉에는 무관상도 함께 세웠다. 마지막단은 약간 넓어지면서 장자각과 능비를 세웠다. 무덤형식은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발해와 통일신라기의 형식과 같다. 내부구조는 대체로 외칸무덤(단실분)으로 평천정구조이다. 안칸 바닥 가운데 관대가 놓이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관이 놓였다. 네 벽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려진 것이 있는데, 왕릉 가운데 벽화가 있는 것은 모두 7기가 확인되었다.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있는 태조 현릉(顯陵)은 태조가 죽은 943년(태조 26) 5월에 만들어졌는데,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뭍혀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차례 이장 경험을 가지고 있다. 즉 현종 9년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고종 4년 거란족이 국경에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고종 19년 강화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원종 11년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충렬왕 2년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1906년(고종43)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하였는데,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 때 12지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길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 금동불상은 등실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있다.
국보급 문화재 39호로 지정된 공민왕 현릉과 왕비릉인 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정릉동 봉명산 기슭에 있는데, 태조 현릉보다 서쪽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365년 공민왕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공민왕은 직접 정릉을 만들었으며, 1372년에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현릉을 만들어 두었다가 1374년 그곳에 묻혔다. 공민왕은 여기에 당대 최고의 기술 및 최대의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였다. 현릉과 정릉은 1905년 경 도굴된 적이 있고, 1920년에 일부 수리공사를 하였으며, 1956년 개성시 문화유물보존위원회에서 다시 수리공사를 하면서 내부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때 무덤구조와 내부시설을 조사하고 벽화를 옮겨 그렸다.
공민왕의 현릉의 벽에는 12지상 그림이 한 벽에 4쌍씩 그려져 있다. 병풍석에 그린 12지상과 같은 모습으로 공민왕이 직접 그렸다고 전한다. 천장에는 해와 북두칠성, 3성 그림이 있으며, 안칸 동벽에는 문을 그리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하게 되어 있다. 동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는 원찰로 세운 광통보제사의 보제선사비가 세워져있는데, 여기에는 광통보제선사와 공민왕릉의 내력이 적혀있다. 한편 태조 현릉 주변에는 사적 54호로 지정된 고려7릉군이 있는데, 그 주인공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7릉 중 6곳은 왕릉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6. 불교문화재
고려시기 개경에는 개경을 불교도시라 일컬을 정도로 수많은 절이 있었다. 조선중기의 한 기록에는 유명한 절만도 성내에 300곳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현재 절 위치와 창건연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만도 30여 개가 넘는다. 또한 고려시기의 절은 종교적인 기능만을 하는 장소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그리 많지 않다. 먼저 지정문화재를 살펴보자. 현재 북한에서 지정된 개성주변의 불교문화재는 국보급으로 지정된 불일사5층탑(35),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와 보물급으로 지정된 연복사종(30), 흥국사탑(31), 개국사석등(32), 관음사(33), 화장사 사리탑(34),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 현화사당간지주(38), 탑동3층탑(39) 등 모두 15개이며, 이중 영통사와 관련된 것이 5개이고 현화사와 관련된 것이 3개이다. 또 형태로는 탑이 7개로 가장 많다.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남긴 영통사는 개성 나성밖 동북쪽인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남쪽에 있다. 이것은 고려초에 창건된 절로서 고려전기 화엄종단의 대표적인 절이다. 절터에는 현재 국보급으로 지정된 영통사5층탑(37), 영통사서3층탑(38)을 비롯하여 보물급으로 지정된 영통사동3층탑(35), 영통사대각국사비(36), 영통사당간지주(37)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3기의 석탑은 모두 고려초기의 것으로 5층탑을 가운데 놓고 좌우에 3층탑이 동서로 서있다. 또 영통사지에는 보물급 36호로 지정된 영통사대각국사비가 있는데, 이 비는 1125년(인종 3)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행적을 기록 한 것이다. 이 비문은 김부식이 지었으며 이 비문을 통하여 화엄승려로서의 의천의 활동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의천의 비는 경상북도 칠곡군의 선봉사지에도 있는데, 선봉사대각국사비는 영통사대각국사비보다 7년 늦은 1132년에 세워졌다. 채충순이 쓴 이 비문에는 천태종 개창자로서의 의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렇듯 1명의 승려에 2개의 비문이 전하는 것은 희귀한 예인데, 이는 천태종 개창을 통해 선종을 통합하고 교종인 법상종을 견제하여 당시의 불교계를 재편하려고 했던 화엄종 승려 의천의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외에도 의천이 입적한 해인 1101년에 작성된 묘지명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영통사지는 남한 불교계의 지원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발굴을 통하여 영통사의 전모가 드러나길 기대한다.
영통사지에서 멀지 않은 개성시 월고리 영취산 아래에 있는 현화사지에도 주요 문화재가 남아있다. 현재 현화사와 관련된 지정문화재는 국보급인 현화사비(40), 현화사7층탑(41)과 보물급인 현화사당간지주(38)가 있다. 이 중 현화사7층탑은 현재 개성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옮겨져있다. 현화사는 현종이 자기 부모의 원찰로 지은 법상종 계통의 절이다. 현종은 1018(현종 9)에 국력을 기우려 현화사를 창건하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 제공하였다. 1021년에 건립된 현화사비는 채충순이 썼는데 여기에는 현화사의 창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현종대 현화사에는 토지가 2000경, 노비 100구를 비롯하여 많은 물자들이 있었으며 학도들이 1000명이 넘었다. 현화사 창건 내력을 적은 비 앞면의 위 부분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까마귀와 토지 조각이 있으며, 비 양 옆면에는 용이 새겨져있다.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옆에 옮겨진 현화사7층석탑은 1020년에 만든 것으로 고려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화사탑에는 탑신받침이 있고, 각층 탑신의 4면에는 감실형태로 판 안상 안에 불상과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현화사7층탑이 있는 개성시 방직동 역사박물관 주변에는 현화사7층탑 외에도 불일사5층탑, 흥국사탑, 탑동 3층탑 등 불탑과 원통사부도가 모여있는데, 흡사 서울 경복궁 앞의 중앙박물관 뜰 안에 여러 곳의 석탑과 부도가 모여있는 것과 같다. 불일사는 951년 광종이 자기 어머니 원찰로 세운 것으로,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기슭에 그 터가 있다. 1959년 발굴하였으며, 그 다음해 불일사5층탑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불일사5층탑은 개성주변에 있는 대표적인 고려초 석탑으로서 국보급 35호로 지정되었다. 불일사5층탑을 옮길 때 불일사탑에서는 금동9층탑, 금동5층탑, 금동3층탑, 작은 돌탑 20여개, 작은 청자 사리단지, 불경 등 많은 유물이 나왔는데, 그것들은 지금 개성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이 주위에는 흥국사탑도 있다. 흥국사는 924년(태조 7)에 개성의 중심부에 세운 절인데, 법왕사 봉은사 민천사 등 개경 중심부에 위치하였던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주요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정치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흥국사는 고려 신종 초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킬 때 거사장소로 정하기도 하였다. 흥국사탑에는 글이 새겨져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탑은 강감찬이 1021년 거란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이 탑은 2층부터 탑신이 없어져서 지붕돌만 포개놓은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새겨진 글에서 탑을 세운 연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고려초기 석탑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개국사석등 역시 역사박물관 주변에 있는 주요 불교문화재이다. 개국사는 935년 개경의 동남쪽에 창건되었는데, 이곳은 나성의 장패문 바로 바깥으로, 당시 개성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개국사는 고려초 동북쪽에 창건한 현성사와 함께 개경의 관문에 위치하여 개경의 안팎을 연결하고 더 나아가서 개경을 방어하는 중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개국사석등은 높이가 4미터에 가까운 커다란 석등으로 4각기둥 모양을 한 전형적인 고려초기의 석등이다. 개국사에는 본래 7층탑도 있었는데, 이 개국사석탑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져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불관 뜰에 남계원석탑의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남계원은 고려시기 개국사에 속했던 원(院)으로 장패문 안에 있었다. 개국사가 개경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에 있었기 때문에 개국사에서 남계원을 설치한 것이다. 고유섭에 의하면 지금 경복궁 뜰에 있는 석탑은 장패문 밖의 개국사터가 아니라 장패문 안의 남계원터에 있었던 것이라 한다. 이와 함께 개성의 불교문화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천사10층탑이다. 경천사는 1113년(예종8) 나성의 남쪽에 세운 절인데, 이곳 역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다. 경천사10층탑은 원간섭기에 원 불교의 영향 속에서 만들어진 탑으로서 얼마 전까지는 경복궁의 뜰에 세워져 있었다. 이렇게 개성의 역사박물관이나 서울의 중앙박물관 등에 불교문화재가 모이게 된 것도 일제강점기의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위치를 확인할 수 없거나 현지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문화재는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하지만, 가능하면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도 이제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보물급 34호로 지정된 화장사 사리탑도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 부도는 개성시 용흥리 화장사터에 있는데, 고려말에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종모양 부도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부도 몸돌 앞면에 ‘지공정혜령조지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서 이것의 주인공이 지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기 개성에 수많은 절들이 있었지만 이렇듯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는 몇 기의 석조물이 전부이다. 그 가운데 개성시 산성리 대흥산성 안에 있는 관음사는 그 자체가 보물급 33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개성의 절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조선후기의 절 집이 지금까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개성에는 복원된 절은 관음사와 안화사 등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것도 제대로 복원된 것은 아니다. 관음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층탑 등의 유적이 있는데, 이 중 관음전 대웅전은 남한에서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정된 문화재는 아니지만 흥왕사지와 천수사지(천수원지)를 불교문화재와 함께 소개할 필요가 있다. 흥왕사지는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있는데, 이곳은 1067년(문종 21) 문종이 덕수현의 치소를 옮기고 대대적인 지원 끝에 창건한 화엄종 계통의 절인 흥왕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1070년 성을 쌓았는데 지금도 성터가 남아있다. 흥왕사는 고려시기 남쪽의 이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천수사지는 장단군 진서면에 있는 고려 예종대에 지은 천수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조선시기에는 이곳에 천수원이 있었다. 이 두 곳은 현대아산이 추진하는 공단지역과 인접하여 우려되는 곳이기도 하다.
* 사진4: 현화사탑(고적도보 것)
7. 선죽교와 숭양서원
고려충절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선죽교는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기의 돌다리이다. 이곳에서 고려말 정몽주가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다리의 옛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정몽주가 피살된 날 밤 다리 옆에 참대가 났기 때문에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고 한다. 선죽교에는 본래 난간이 없었는데 지금 있는 난간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이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하여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선죽교는 국보급 36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옆에는 한석봉이 썼다고 전하는 ‘선죽교(善竹橋)’라고 쓴 비석이 있다. 또한 이 다리 주변에는 정몽주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숭양서원과 표충비이다. 사적 51호로 지정된 숭양서원은 정몽주의 집 자리에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중기이후 본받을만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동시에 유학공부를 시켰던 일종의 사립학교이다. 숭양서원에는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져있다. 또 근처에는 조선후기 이후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 2개가 비각 안에 들어있는데, 북쪽 것은 1740년 영조가, 남쪽 것은 1872년 고종이 개성에 와서 그의 충절을 기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 사진5: 선죽교
8. 맺음말
개성과 개성주변의 문화유적은 고려 멸망 후 조선왕조에 의해서 철저하게 그 보호가 외면되었고, 일제시기를 전후하여서는 도굴과 약탈에 방치되었으며, 해방이후에도 보호와 복원을 위한 손길이 제대로 닿지 않은 상태이다. 결과적으로 개성주변의 문화재에 대한 체계적인 기초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개성의 문화재에 대한 제대로 된 종합목록하나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은 다른 왕조의 수도였던 평양 경주 서울에 비하여 인위적인 파괴가 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의 피해도 상대적으로 덜했으며 그 이후의 개발도 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철저한 조사와 체계적인 보호와 복원을 위한 대책을 세운다면 다른 지역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성공단사업은 지금까지 방치하다시피 한 개성주변의 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개성과 강화 서울을 포괄하는 이른바 한강하류지역은 한반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지역으로 고대부터 쟁패의 대상이었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허리이자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밖으로 나가는 문호였다. 지금 이곳은 남북분단으로 거의 쓸모 없는 땅이 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이곳을 남북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고 획기적인 일이고, 마땅히 하루라도 빨리 추진되어야 한다. 다만 눈앞의 공단개발이나 관광사업의 이익에만 집착하지 말고 중세도시 개성의 보호와 복원, 더 나아가서 한강하류의 종합적인 개발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도 함께 마련하기를 바란다.
자료출처 : 역사비평 54호(2001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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