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후출처 - 삼국시대의 석탑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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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을 완성시킨 두 날개, 백제탑과 신라탑 |
우리에게 불탑이 목탑으로 소개된 이후 200여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 백제인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석탑이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석탑은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불탑으로 방방곡곡에 끝없이 세워지고, 시대를 거듭하는 동안 갖가지 스타일과 우수한 명작을 선보여 왔다. |
이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4세기 말로 이 때 세워진 탑들은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초창기 절안의 핵심 건물은 두말할 나위 없이 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탑들은 거의 모두가 목탑이었다. 당시 백제의 탑 만드는 기술은 매우 뛰어나 그 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였는데, 이렇듯 고도의 탑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백제인들은 7세기 초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창조력을 발휘하여 목탑의 형상을 그대로 석탑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 석탑이 바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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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워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는 석탑 축조 기술이 진일보하여 더욱 정제된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즉, 목탑에서 본뜬 복참한 구성들이 더욱 간결하고 질서 있게 정리되었으며, 반듯한 몸체에 평활한 지붕을 얹어 단정하면서도 여유와 고요함이 서린 백제 석탑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조하였다. 또한 짜임새가 완벽하고 조형 기법이 탁월하여 백제 석탑은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축조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완숙된 기량을 터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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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도 7세기에 들어 석탑이 등징하였다. 선덕여왕3년(622년)에 조성된 경주 분황사모전석탑이 바로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 석탑이다. 그러나 이 탑은 목탑을 모델로 한 백제석탑과는 달리 중국의 전탑(벽돌탑)을 모방하여 일일이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이를 포개고 짜맞추어 세웠으니 재료만 석탑이지 사실 그 모습은 벽돌탑이나 다름이 없다. |
현재 3층만 남아있는 분황사탑은 원래 구층탑이었다고 하며, 삼국시대의 불탑답게 역시 규모가 제법 크다. 기단 위 네 모퉁이에는 돌사자를 배치하고 1층탑신의 네 벽에는 널찍한 돌로 출입문도 달아 내부로 통할수 있게 했으며 문 양옆에 인왕장을 조각, 탑문을 지키게 했다. 그런데 벽돌탑을 모방하다보니 탑에는기둥이 전혀 없고, 처마 밑과 지붕 위는 자연히 층단이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탑의 표면곳곳에는 회를 칠한 흔적이 있어 이석탑은원래탑 전체가 온통 흰색으로 치장되었을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 이밖에도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에도 영탑사 팔각칠층석탑어 있었다고 하나 그 형태를 추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확실히 백제의 석탑은 이미 삼국시대에 뿌리를 내린 목탑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석탑의 재현에 성공하였고 아울러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나라 불탑의 주류를 석탑으로 확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또 7세기에 들어 서산마애삼존불, 군위 삼존석굴, 태종무열왕릉비 등 격조 높은 석불상과 석비들이 제작되는 시대적 분위기도석탑의 발생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고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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