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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출처 - 총독부의 불교정책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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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 김 순 석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을 중심으로-

 머리말
1.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상황과 조선 총독부의 불교정책
  1)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상황
  2)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2.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 개혁세력의 성립과 활동
  1) 조선불교청년회의 성립
  2) 조선불교유신회의 창립과 사찰령(寺刹令) 철폐운동 
3.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단일기관 설립운동
  1)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불교교무원의 성립과 갈등
  2)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
맺음말    


머리말

일제가 1910년 8월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래로 10년간 무단통치를 실시한 결과 1919년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조선인들의 저항을 경험하고 나서 통치정책을 강압 일면도의 무단통치에서 다소간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감시를 강화하여, 조선민족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문화정치라는 형태로 전환하였다. 문화정치의 내용은 종래의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식민지 조선에서 경찰과 경찰관서 및 예산을 3배 이상으로 증대시켜 조선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1) 조선인 내부에서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운동 전선을 분열시켰고 나아가서는 친일파를 통하여 민족주의자들을 검거하는 이중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은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는데 민족주의자들 가운데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치론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는가 하면 종래의 실력양성론이 보다 큰 설득력을 가지는 등 실제로 일정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에 부임한 조선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재등실(齋藤實))는 조선에서 민족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선인 내부에서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정책을 입안하였다. 일제는 친일성이 강한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민족적 성격을 띤 기존의 단체들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이 만든 친일단체로 하여금 대표성을 띠게 하였고, 일본인을 친일단체의 고문으로 앉혀서 어용화 하였다.2)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의 종교단체에 취한 정책은 각종 종교단체를 중앙집권화하고 친일파를 대표자로 앉혀서 종교세력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다.3) 그 과정에서 민족세력과 친일 세력의 갈등을 조장하여 끝내는 친일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도록 주변에서 지원하였다.

  1920년대 조선불교계의 상황은 1920년 6월에 자주성이 강한 조선불교청년회가 창립되고, 이어서 1921년 12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원 가운데서 비교적 소장파들로 구성된 불교유신회가 발족하였다. 불교유신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세력들은 당시 불교계가 당면하고 있던 현안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30본산 주지들에게 국한시키지 말고 일반 불교도들까지 참여하는 불교도 총회를 소집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결할 것을 제안했지만 기득권 세력인 본산 주지들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불교유신회원들은 일제 시기 전반을 통하여 일제가 조선불교계를 장악하였던 사찰령 철폐운동을 전개하는 등 자주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불교계에서 통일기관 설립에 대한 필요성은 조선불교청년회에서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불교계의 단일기관인 총무원(總務院)을 설립하였다. 당시 총무원에 가담했던 10본산으로는 통도사(通度寺)·해인사(海印寺)·범어사(梵魚寺)·기림사(祈林寺)·석왕사(釋王寺)·백양사(白羊寺)·송광사(松廣寺)·봉선사(奉先寺)·위봉사(威鳳寺)·건봉사(乾鳳寺)·를 들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조선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본산들을 중심으로 1922년 5월 26일과 27일 양일에 걸쳐 본산 주지 회의를 개최하여 기존의 총무원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단일기관인 '조선불교교무원(朝鮮佛敎敎務院)'의 설립을 결의하고, 총무원에 가담한 10본산들의 주지들이 퇴장한 가운데 60만원의 재단법인을 만들기로 합의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92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과정은 조선총독부의 민족분열정책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과정을 검토한 본격적인 논문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래의 논고4)들을 참고할 수 있다. 이들 논고들에서는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불교교무원이 갈등을 겪으면서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식민지 통치정책과의 상관관계를 주목하지 못했다. 따라서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는 과정이 조선불교계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파생된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마저 있다.

  김광식은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의 사적 고찰(史的 考察)」에서 조선불교교무원에서 1923년에 임제종 묘심사(臨濟宗 妙心寺)의 승려 가미야 소이치(신곡종일(神谷宗一))가 교무원의 고문으로 초빙된데 대하여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유신회를 대표하여 교무원의 반민족성과 반불교성을 질타한적이 있다라고 언급하고, 교무원측은 관력을 이용하여 총무원측이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고 지적하였지만 그러한 사실이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민족분열정책의 일환이었음에 착안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1920년에 들어와서 조선불교계에서는 민족적 성격을 띤 조선불교청년회와 조선불교유신회가 성립5) 되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불교총무원이 성립하여 자주적으로 불교도들의 총의를 수렴하여 통일기관을 수립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

  당시 불교계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에서는 친일적 성향이 강한 본산 주지들로 하여금 조선불교 교무원이라는 또 다른 친일단체를 만들게 하여 조선불교계의 분열을 조장시켰고, 끝내는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1922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승인하였고, 1923년 11월에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혔다. 이후에도 총무원과 교무원은 갈등을 거듭하다가 결국 1924년 4월에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주의 노선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조선총독부가 취한 조선불교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불교가 조선통치에 기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3·1운동이 종교계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발발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종교계의 회유에 나섰다. 그 가운데 하나가 종교단체의 법인 승인이었다. 일제는 각종 종교 단체를 중앙집권화 하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단체에 법인을 인정함으로써 제도적으로 관할 관청의 통제를 받게 하여 종교계의 통제를 원활하게 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본고에서 정부기록보존소 문서 가운데 총독부 당국이 자주적인 총무원 측의 사찰의 주지 임명을 지연시키고, 나아가서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가입하도록 지침을 시달하였음6)을 밝혀 내었다.

  본고에서는 1920년대 초반에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민족분열정책의 구체적인 실례를 1924에 자주적인 불교세력이었던 조선불교총무원과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았던 조선불교교무원이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1.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상황과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1)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상황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는 1911년에 사찰령의 시행으로 성립되었던 선교양종(禪敎兩宗) 30본산회의원을 해체하고 1915년 30본산연합사무소로 그 명칭을 바꾸고 경성부 수송동 각황사에 본부를 두었다. 7)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는 강학(講學)과 포교(布敎)를 위주로 하는 조선각본사연합제규(朝鮮各本寺聯合制規)를 제정하여 1915년에 2월 25일자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승인받았다. 그리고 30본산연합사무소의 총회를 개최하여 최초의 위원장으로 수원 용주사(龍珠寺)의 강대련이 선출되었고8) 이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는 1920년까지 이어져왔다.

  1920년에 들어서 조선불교계는 한차례의 큰 소란을 겪게 되었으니 이회광(李晦光)이 1910년에 이어서 또다시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연합시키려 한 것이 그것이다. 이회광은 1919년 12월 이래로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 임제종 묘심사(臨濟宗 妙心寺) 출장소의 승려 고토 쯔이강(후등서암(後藤瑞岩))과 결탁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부속시키려는 책동을 벌였다.9) 이회광은 조선총독을 만나서 의견을 진술하던 가운데 조선에는 지금 여러가지 종(宗)이 있으나 그 중 선교양종(禪敎兩宗)은 몇 천년전 신라나 고려 때에 적합하였지 현재 조선에 적합지 못하고 조선 이후로는 임제종이 조선불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고 그 후로 고토 쯔이강 후등서암(後藤瑞岩)과 왕래가 잦았으며,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연합시키려 하였다.

  이회광은 조선불교를 개혁하자면 일본 불교의 포교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경상남북도의 모모(某某) 주지와 5월 초이튼날 동경을 방문하여 총리대신과 체신대신을 만나 조선불교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조선불교가 진흥치 못할 것이니 조선불교의 종명(宗名)을 개칭하여 사찰(寺刹)의 재산을 정리할 뜻을 이야기 하였더니 그 사람들도 대찬성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10)

  일본에서 돌아온 이회광은 경상남북도의 8개 본산11) 주지들을 대구로 불러모아 회의를 개최한 자리에서 조선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불가불(不可不) 종명(宗名)을 개칭하여, 종무원을 설립하고 사찰재산을 정리해야 되므로 30본산에 통문을 보내어 종명개칭 신청서와 이유서에 연명(連名)해 가지고 총독부에 제출할 것이라 한 즉, 그 자리에 모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일을 30본산연합사무소와 의논하면, 자연 의사 충돌이 생겨서 안될 것이니 우리 경상도 8본산이 먼저 수창하여 30본산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들으면 좋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하기에 이 회광은 그 말이 유리할 듯하여 조선안에 있는 사찰에 공문을 발송했더니 이것을 본 각 사찰에서 30본산연합위원장 강대련에게 이 사실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다.12)

  이회광의 이러한 책동은 1920년 6월 4일자 경도(京都)에서 발행되는 중외일보(中外日報)에 보도가 되었다. 이와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이었던 강대련은 총독부에 들어가서 종교과장 나까라이 키요시(반정청(半井淸))를 만나 이회광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앙정부와 교섭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 임제종 묘심사파에 부속시킨다고 하여 조선 각 사찰의 승려가 동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고 대책을 묻자, 종교과장 나까라이 키요시(반정청(半井淸))는 조선의 사찰은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총독이 결단할 것이니까 아무리 각 대신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13)

  당시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불교청년유학생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동년 6월 20일자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경도(京都)에 있는 임제종 대학과 중학에 재학하는 조선불교 유학생 20여명에게 동맹 퇴학 권고문을 발송하여 전학하게 하고자 하였다.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불교청년유학생들은 조선의 불교가 경솔한 몇 사람에 의하여 멸망의 화를 입게 됨을 앉아서 볼 수는 없는 일일 뿐만아니라, 만여명의 조선승려는 한 사람도 저들의 망동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아울러 일본 임제종 묘심사(臨濟宗 妙心寺)파에도 조선에 있는 1,500여처의 사원과 10,000여명의 승려는 한 사람도 이 사실을 즐겨할 자가 없은 즉 저들 무리들의 망령된 의견을 듣지 말라고 경고하였다.14)

  조선불교계를 일본 불교 임제종파에 연합시키려는 책동에 대해서 반대의 논의가 들끓자 이회광이 믿었던 경상남북도 8본산 마저도 이회광의 책동에 반대하고 나섰고 후술하게 될 불교청년회에서 맹렬하게 반대하여 이회광으로 하여금 중외일보(中外日報)의 기사를 철회하게 하라고 하였다.15) 이회광이 조선불교계를 일본 불교 임제종 묘심사파에 연합하려는 책동은 조선불교도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이회광은 강대련이 중외일보 기사를 번역하여 조선의 각 사찰에 돌린 결과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강대련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는 촌극을 벌임으로써 일단락되게 되었다.16)

  이 무렵 조선불교계에서는 통일기관 설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불교청년회도 통일기관 설립운동의 일환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청년회 측에서 통일기관 설립과는 별개로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도 통일된 중앙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1920년 연말에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총회에서 30본산연합사무소를 폐지하고 종무원을 구성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월정사 주지 홍포룡(洪蒲龍)이 종무원장에 선임되었다. 종무원장으로 선출된 홍포룡은 1921년 1월 10일 30본산연합사무소를 종무원으로 변경하겠다는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였으나 총독부 종교과에서는 이것이 사찰령 위반이라하여 허가하지 않을 듯하였지만 홍포룡은 총독부의 허가와는 상관없이 조선의 승려가 어떠한 상황하에서든지 한덩어리가 되어 조선문화 사업에 공헌하고자 한다고 천명하였다.17)

  홍포룡은 불교사업으로 경성에 각황사(覺皇寺)와 교육기관으로 중앙학림(中央學林) 그리고 몇 개의 포교당이 있을 뿐 불교사업이 미진한 원인이 재정이 통일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종무원장 아래에 총무 한 사람이 있어 각 사무를 통괄하고 그 아래로 서무부장·재무부장·교무부장·학무부장을 두어 서무부장은 일반 서무에 관한 것을 장리(掌理)하게 하고, 재무부장은 조선 각 사찰에 대한 재산을 관리하고, 학무부장은 불교청년에 대한 교육사업을 맡아하게 하고, 교무부장은 포교사업을 담당하게 하는 사무를 분장하였다.18)

  홍포룡은 사업기초로 당시 죽동궁(竹洞宮) 기지를 판다는 말이 있으므로 그것을 사서 그곳에 종무원을 설립하고 현재의 중앙학림을 불교전문학교로 만들고, 지방에 있는 적은 학교를 전부 합치어 경성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지방에 있는 지방학림은 소학교와 같이 만들어 교육에 힘쓰고, 불교를 크게 선포하자면 포교사 양성이 시급하므로 포교사 양성소를 설립할 계획을 밝혔다.19)

  이러한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 가장 급선무가 자금을 확보하는 문제인데 각 사찰에서 해마다 연합사무소에 수입되던 돈이 일년에 10,000원 밖에 안되므로 이미 언급한 사업만을 시행하는데도 300,000만원이 소요될 것이므로 1월의 정기 주지총회에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므로 3월 15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예산을 편성할 것인데 예전에는 각 사찰의 소유 전지(田地)의 석수(石數)를 조사하여 부과하던 것을 지금부터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책정된 법정지가(法定地價)에 의거하여 부과할 것 이므로 불공평하다는 비난은 듣지 않으리라고 하였다.20)

  이어서 3월 16일에 개최된 30본산 주지 총회에서 종무원의 재무부장으로 선임되었던 봉은사(奉恩寺) 주지 김상숙(金相淑)은 재무부장직을 사퇴하면서 종무원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퇴 이유로써 종무원 제도가 사찰령(寺刹令)에도 없는 제도이고, 연래(年來)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총회에서 가결된 배당액도 올려 보내지 않아서 연합사무의 경비도 곤란하였는데 300,000원의 거액 조달이 어려울 뿐만아니라 종무원은 총독부의 제령에 의해서 성립한 것도 아니므로 구속력이 없는데다 곡진한 의논이 있어야 가능할텐데 전례를 보건대 위원장이나 간부가 너무 전제적이고 죽동궁(竹洞宮)의 터를 산다는 말은 자기가 듣지도 못한 일이라 여러 가지 관계상 종무원을 탈퇴하며, 재무부장직도 사퇴한다고 진술하였다.21) 그런 가운데 회의가 계속되어 재무부장에는 다시 김상숙(金相淑)이 추천되었다. 30본산 주지 총회는 17일에도 계속되었지만 별다른 방침없이 산회(散會)되었다.22)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상황은 30본산연합사무소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고, 당시 위원장이 었던 강대련과 전임 위원장이었던 이회광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암투는 이회광측이 조선불교계를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에 연합시키려는 책동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조선불교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서 좌절되었다.



  2)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강동진은 1920년대에 일제가 실시한 문화정치의 특징을 분할통치라고 규정한 바 있다. 분할통치란 식민지 내부의 종족적·계층적·종교적 대립을 이용하여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국민적 통일과 민족운동의 발전을 가로막기 위한 분열정책이라고 규정하고, 열강들이 모두 식민지에 의회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해서 식민지 민족자본가를 분열시켜 그 상층부에 대한 회유와 포섭을 꾀했던 것이 그 단적인 현상이라고 하였다. 23)

  일제는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이래 무단통치를 통해서 지배해왔지만 1919년 3·1운동의 발발로 조선인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하였다. 3·1운동이 종교계 지도자들에 의해서 발단이 되었음에 주목한 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의 종교 성분을 분석한 결과 천도교 15명,기독교 16명(장로교와 감리교파 포함), 불교 2명으로 분석했다.24)

  이상과 같은 분석에서 종교의 정치관여가 조선 역사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단정한 사이토 마코토(재등실(齋藤實)) 총독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와 함께 학무국에 종교과를 신설하고 외국인 선교사와 양해친화(諒解親和)를 도모하고, 포교규칙(布敎規則)의 개정, 사립학교규칙 개정, 종교단체의 법인화 허가 등 잇달아 종교에 관한 종무방침을 시달했다.25)

  일제는 3·1운동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단체가 대중결집의 매체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3·1운동 이후에도 여전히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들 종교단체를 분열시켜 재편성을 통해서 어용화를 꾀하면서 민족주의자를 몰아내는 방법을 썼다.26)

  3·1운동 이후 일제가 조선불교계에 취한 정책은 천도교나 기독교 등 여타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 세력을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1920년에 만들어진 사이토 총독의 문서 가운데 「조선의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 가운데 '종교적 사회운동'을 살펴보면 조선불교에 대해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제휴로 불교적 사회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음의 6개 항목을 들었다. 27)

1) 사찰령을 고쳐 경성에 전국 30본산을 통할하는 총본산(總本山)을 세우고 중앙집권화를 꾀한다.
2) 총본산(總本山)의 관장(官長)에는 친일주의자를 세운다.
3) 불교진흥촉진단체를 만들어 총본산의 옹호기관 노릇을 시킨다.
4) 진흥촉진단체는 본부를 경성에 두고 회장을 거사(居士) 중 친일주의자 중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채운다.
5) 이 단체의 사업을 일반 인민의 교화, 죄인의 감화, 자선사업 기타로 한다.
6) 총본산·각본산·불교단체에 상담역으로 인격있는 내지인(內地人)을 둔다.28)

  일제의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1922년에 조선불교계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성격을 띠는 조선불교총무원이 일제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와해되고, 뒤늦게 출발하여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친일적 성향의 조선불교 교무원이 총무원 세력을 흡수·통합하여 1924년 4월에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29)

  조선총독부는 단일기관으로 성립된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장악함으로써 조선불교계 전체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었고, 그 댓가로 일종의 회유 수단으로써 종교단체의 재산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 아래 재단법인을 인가해 주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종교계에 취한 정책 가운데 중요한 것은 종교 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거액의 부동산을 내국 법인으로 허가해 줌으로써 구한국 시대 이래 조선에서 외국인 단체의 부동산에는 법인격을 인정치 않는 관례가 있었던 것을 1920년 '종교 및 제사를 목적으로 하는 재산'에 한해 민사령에 따른 공익법인으로서 그 기본재산을 관리유지하는데 편의를 꾀해 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많은 선교사들을 친일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종교단체를 친일화 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0)

  종교단체에 법인화를 인정하는 것은 종교의 사회적 신용을 높이는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의 감독하에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법인은 재산상의 소유권은 보장을 받게 되지만 이사가 바뀔 때마다 관할 관청에 신고를 해야하는 것을 비롯해서 매년 법인의 활동상황 및 자산의 증감 현황 그리고 수입과 지출 상황을 매년 회계연도 말에 조선총독부에 보고하고 감독을 받아야만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법인의 상황을 점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종교단체를 보다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31)

  

2.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 개혁세력의 성립과 활동

1) 조선불교청년회의 성립


  식민지 시대 조선불교계는 사찰령 체제 아래서 자주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조선총독이 30본산 주지들의 인사권과 경제권을 장악한 상황하에서 일부 주지 계층은 기득권 수호를 위하여 지배권력과 타협하였고, 그로 인하여 중요한 불교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사업과 포교사업은 지지부진하였고, 재정운영은 불투명하였다.32) 불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이 승려가 관권과 결탁하여 각종 부패의 근원이 되었고, 오늘날과 같이 불교가 타락하게 된 원인을 한두 가지로 이야기 하기는 어렵지만 관권(官權)과 결탁한 것은 주요한 원인의 하나였다.33)

  불교계 일각에서는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관권과 결탁된 일부 주지 계층의 권위적인 행태를 시정하고, 불교계의 당면한 현실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이며, 민족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불교청년운동의 시원은 1910년에 일어났던 임제종 설립운동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1938년 한용운이 불교청년운동의 부활을 주창하면서 임제종 설립운동을 회고한 바에 의하면 "당시 임제종 운동이 호남일우(湖南一隅)로부터 영남(嶺南) 일대의 전조선 불교계를 풍미하매 불교청년운동은 누구든지 피가 뛰고 주먹이 쥐어져서 일호백낙 일파만파(一呼百諾 一波萬波)로 보종운동 (保宗運動)의 예비병으로 대기(待機)의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34) 라고 한데서 불교청년운동의 시발이 1910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교 교육의 중추기관이라고 할 수 있었던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5월 12일에 각 지방으로 발기인 대회 개최에 관한 통지서를 띄우고35) 동년 6월 6일 중앙학림에서 전국불교청년회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여, 청년조직에 대하여 협의한 후 임시 실행위원을 선정하였다.36) 이어서 6월 9일 역시 중앙학림에서 청년회에 대한 규칙 및 취지서를 제정하여, 위원회를 통과시키고, 창립총회에 대한 방침을 협의하고, 6월 20일 하오 1시에 각황사(覺皇寺)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수백명이 출석하여 제반회무(諸般會務)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거하였다.37)

  조선불교청년회 창립취지서를 살펴보면 첫째는 교조(敎祖) 석가모니의 정법으로 세계 민중을 제도하기 위한 불타정신(佛陀精神)의 체험(體驗), 둘째는 예전 삼국시대에 찬란했던 불교문화가 근대에 들어와서 쇠퇴해진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합리적 종정(合理的 宗政)의 확립(確立), 셋째는 조선의 불교는 천년 세월이 지난 낡은 집과 같아 나이든 노승(老僧)들은 옛날 이야기만 하고 앉았고, 쏟아지는 많은 새로운 지식들을 수용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대중불교(大衆佛敎)의 실현을 위하여, 우리 청년들이 현실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청년회를 창립한다고 밝히고 있다.38)

  이렇듯 불교계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선 조선불교청년회에서는 창립 직후부터 당시 이회광의 매종행위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나섰다. 조선불교청년회에서는 이회광을 조선불교를 망하게 하는 악마이며, 조선사회에 대한 중대한 죄인으로 규정하고 이회광을 절대로 용서치 못하겠으므로 4개항의 결의문39) 을 채택하였다.40) 조선불교청년회에서는 1920년 12월 15일에 지방위원들과 간부들이 모여 유신예비회(維新豫備會)를 개최하고, 다음날인 16일에 유신협의회(維新協義會)를 개최하고 당시 불교계가 당면하고 있던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30본산연합사무소에 8개항의 건의문41)을 제출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가 8개조의 건의문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논의 되었던 토의 내용을 살펴보면 종래 30본산 주지들의 독단적인 사찰운영을 부정하고 만사(萬事)를 민중적 공의(民衆的 公議)에 의해서 결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30본산연합제규를 수정하여 위원장 아래 의사·서무·재무·교육·포교·법규(議事·庶務·財務·敎育·布敎·法規)부장을 둘 것을 요구하였다. 재정부분에 있어서는 재정관리를 일원화 해서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관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문제에 관해서는 일요학교·유치원·보통학교를 신설할 것과 지방학교를 병합하여 도시에 중학교를 경영할 것, 그리고 중앙학림을 전문학교로 승격시킬 것과 일본·지나·인도(日本·支那·印度)에 유학생을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아울러 종래의 번잡한 의식을 개선하고, 경성에 홍교원(弘敎院)을 세워서 포교에 힘쓰게 하고, 인쇄소를 설치하여 인쇄물의 발간을 통한 교리의 전파와 홍보활동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42)

  조선불교청년회는 이러한 구체적인 사업들을 실천할 수 있는 중앙기관을 확립하고, 통일적 집권체를 확립하기 위하여 해당한 각 부문에 각 부서를 배치하고 연합사무소와 교섭할 교섭위원으로 김석두·이환해·이춘담·김경봉·김락순(金石頭·李幻海·李春潭·金鏡峰·金洛淳) 등 15명을 선출하였다.43) 조선불교청년회의 구성원들은 당시 조선불교계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2) 조선불교유신회의 창립과 사찰령(寺刹令) 철폐운동

  불교유신회가 창립되게 된 배경은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시정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던 불교청년회의 활동에서 실제로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 있는 행동대원들의 필요성으로 인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겠다. 청년회에서는 전불교계(全佛敎界)의 중심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개혁을 단행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객관적인 형세가 여러 가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별개의 화신(化身)으로 유신회가 나타났던 것이다.44)

  불교유신회는 1921년 1월 30본산 주지 총회가 열릴 때 임시로 조직되어 여러 가지 일을 건의한 바 있었지만 임시로 구성된 것이었으므로 미흡한 감이 없지 않아서 1921년 12월 13일경에 내년 경성에서 열리는 30본산 주지 총회에 불교계의 혁신할 사안들을 제출하기 위해서 불교청년 중 김법광(金法光) 외 4명의 발기로 불교유신회를 발기하여 지방에 있는 각 사찰 청년에게 가입을 권유하여 참가를 승락한 사람이 수백명이나 되었다고 한다.45) 당시 불교계의 모(某)씨로 표현되는 사람의 진술에 의하면 불교유신회는 조직된 이후에 여러 가지 일을 하고자 지방에서 회원가입 권유를 통하여 가입한 사람이 1,000여명이나 되었고, 25일 내로 발기인 총회를 열어 대체의 방침을 결정하겠지만 우리 생각에는 첫째 여러 가지 불교의 제도를 변경할 일, 둘째 모든 재정을 통일할 일, 셋째 여러 사찰의 소유재산을 정리할 일, 넷째, 학문을 일으키고 포교를 성실히 할 일 등 네가지 강령이다라고 말하였다.46)

  불교유신회는 1921년 12월 20일에 발기인 총회를 열고47) , 대강의 방침을 결정한 후 21일 오후 2시부터 간동(諫洞)에 있는 불교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규칙과 임원 선정 등 기타 사무를 협의 하였다.48) 불교유신회에서는 1922년 1월 3일에 수송동 각황사(覺皇寺)에 있던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되었던 30본산 주지 총회에서 먼저 시바다(시전(柴田)) 학무국장의 인사가 있었고, 임시의장으로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을 추천하고 산회(散會)하였다. 이튼날 이회광의 자격문제가 시비가 되어 이회광이 회장직을 사퇴하고, 불교청년회에서 조직된 불교유신회에서 발언권을 요구하여 회의 양식을 조선승려대회로 하자는 발언이 있어 청년측과 주지측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그 가운데 몇몇 본산은 30본산연합회에서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49)

  불교계의 혁신을 주장하며 30본산연합회에서 탈퇴를 주장한 측의 주장은 30본산이 결성될 때는 사업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십년 동안 아무런 성공이 없었고, 시세가 변하여 감으로 먼저 30본산연합회를 깨트리고 다른 방법으로 연합하여 새사업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측의 논리는 의무분담금에 대해서도 반대가 있는 이 시점에서 30본산연합회를 깨뜨려 버리면 다시 수습할 수 없는 비참한 현상이 벌어질 것이고, 종래에 해오던 사업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니 현상을 유지하면서 개혁은 장래를 보아 가면서 서서히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50)

  1922년 1월 6일에 속개된 30본산 주지총회에서 그 회의 명칭을 주지총회로 할 것인가, '조선불교총회'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투표에 붙인 결과 참석한 주지 24명 가운데 불교총회로 해야한다는 것에 찬성한 사람이 13명, 주지 총회로 해야한다는 사람이 11명으로 종래 30본산 주지 총회는 조선불교 총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의장에는 전라북도 전주의 위봉사(威鳳寺) 주지 곽법경(郭法鏡)과 박한영(朴漢永)이 동점이 됨에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다가 제비뽑기를 하여 박한영이 의장에 선출되었다.51)

  동년 1월 7일 오후에 수송동(壽松洞)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개최된 조선불교총회는 임시의장 박한영의 사회로 출석인원을 점검하고, 의장이 '불교도총회'가 열리게 된 유래와 주위의 여러 가지 곤란한 사정을 들어 불교청년들이 과분한 요구를 하여 공론으로 그치게 할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력을 돌아보고 상당한 요구를 해야 원만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하였다.52)

  1922년 1월 6일의 30본산 주지회의에서는 종래의 30본산 주지 총회를 '조선불교총회'로 바꾸는 것이 결정되었는데 1월 7일 조선불교도 총회에서 30본산연합제규는 몇몇 주지들이 전제(專制)로 하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지 아니하니 폐지하여야겠다는 안이 나오자 만장일치로 폐지가 가결되었다.53)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한 조선불교도 총회에서는 조선불교계 통일기관으로 후술하게 될 총무원을 두기로 결정하고, 그 아래에 이무부(理務部)와 사무부(事務部)를 두어서 이무부에서는 포교와 교육에 관한 일을 담당하고, 사무부에서는 서무(庶務)와 재정에 관한 일을 하기로 하였다.

  중앙학림은 500,000원의 기부금으로 재단법인 불교전문학교를 만들고, 종래에 불교계에서 운영해 왔던 동광고등보통학교(東光高等普通學校)와 신명학교(新明學校)는 현상태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통일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하기 위하여, 오성월(吳惺月) 외 14인을 선정하여, 그 위원들은 그 해 3월 내로 종헌(宗憲)을 제정하여 불교도 총회를 열어 통과시키기로 하였다.54) 불교유신회에서는 회원 150여명이 1922년 3월 24일에 각황사에서 총회를 열고 불교개혁에 대하여 건의안(建議案)을 제출하였고, 총무원의 기초를 공고히 할 일과 교육과 포교에 힘쓸 일을 상의하고, 26일에는 회의를 열어 교헌(敎憲)을 통과시킬 예정이었다.55)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른바 '명고사건(鳴鼓事件)'이 발생하였다. '명고사건(鳴鼓事件)'이란 당시에 개최되고 있던 불교유신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강신창·김상호·정맹일(姜信昌·金尙昊·鄭孟日) 등 유신회원 백여명이 수원 용주사 주지 강대련(姜大蓮)에게 소고(小鼓)를 등에 지우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大惡魔姜大蓮 鳴鼓逐出)'이라는 깃발을 들고 남대문에서 종로 네거리를 지나 동대문을 향해서 가두행렬을 하면서 강대련에게 수모를 준 사건을 말한다. 이 급보를 접한 종로경찰서는 즉시 10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5명을 구속하였다.56) 이 사건은 5월 16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주모자 강신창·김상호·정맹일(姜信昌·金尙昊·鄭孟日) 등에게는 징역 6개월, 양무홍(梁武弘) 징역 4개월, 박문성·박종진·기상분·김지준(朴汶星·朴宗眞·奇尙焚·金知俊)에게는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었다.57) 강신창·김상호·정맹일(姜信昌·金尙昊·鄭孟日) 등은 경성 고등법원에서 집행유예 3년을 언도 받았다.58)

  이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원래 강대련은 불교유신 사업을 반대하고 사찰의 재산을 농락하여 횡포한 일이 많았으므로 강신창의 발언으로 성토 강연회를 열려고 하였지만 김상호의 말이 이전 백장화상(白丈和尙)의 청규에 의지하여 '명고축출(鳴鼓逐出)'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정맹일과 상의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59)

  불교유신회에서는 당시 불교계의 최대 장애였던 사찰령 폐지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4월 19일자로 불교유신회원 유석규(劉碩規) 외 2,284명의 연서로 장문의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사찰령 폐지에 관한 건백서의 내용은 전문이 전하는 것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전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였으며, 서문(序文)은 "자체적 사원제도는 총림청규의 특색이며 1.600여년의 역사이다"로 시작하여 "하루라도 조속히 사찰령을 폐지하여 불교자체의 통제에 일임하라"로 끝을 맺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60) 개략적인 내용은 30본산제도의 시행으로 말미암아 본산 주지들은 자리 다툼에 골몰하고 있으며, 본산 주지는 말사(末寺) 주지를 압박하여 부질없이 원망하는 폐단이 생기어서 불교사업은 말이 못되게 황폐되었다.61)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사찰령을 하루 속히 폐지하고 불교계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유신회에서는 총독부로부터 사찰령 폐지에 관해서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자 1923년 1월 6일에 또 다시 사찰령 폐지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하고 박한영·김경홍(朴漢永·金敬弘) 외에 7명, 도합 9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1주일 안으로 당국에 다시 질문하기로 하였다.62)

  1월 7일 불교유신회 제2화 총회는 김종천(李鍾天)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회의 벽두에 의원을 개선하자는 결의가 있어 종래의 임원을 모두 경질하였는데 전무이사에 강신창·황일규(姜信昌·黃日圭) 등을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강신창이 일어나서 불교유신회에서 추진한 사업에 대하여 그 동안 아무런 성공이 없었으며, 당국의 무리한 간섭에 대하여 수수방관한 일반회원의 무기력·무정성함과 간부 일동의 무능력함을 질타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이전 간부가 일어나서 "우리가 진실로 정성이 없음이 아니라 배후의 모든 폭력이 그렇게 한 것이라, 그러나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터인 즉 과거의 모든 불미한 허물은 우리가 지는 터이다"라고 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유신회를 탄압하였던 배후세력은 총독부의 관력(官力)이거나 또는 그것과 결탁된 친일세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63) 이후 1923년 5월 26일 불교유신회에서는 총독부에 또 다시 사찰령 폐지를 건의하였다.64)

  불교유신회에서는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종래의 30본산 주지총회를 불교도총회로 전환하여 일반 불교도들의 의견을 청취하고자 하였으며, 식민지시대 가장 큰 모순으로 인식되었던 사찰령 폐지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불교유신회의 활동은 관권과 결탁한 주지 계층으로부터 외면당하였고,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3. 1920년대 초반 조선불교계의 단일기관 설립운동  

1) 조선불교총무원과 교무원의 성립과 갈등


  조선불교총무원의 탄생은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원의 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다. 1922년 1월 초에 수송동 각황사에서 열린 30본산 주지 총회에서 30본산연합회의 성과를 거론하는 자리에서 불교유신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30본산연합제규는 몇몇 주지들이 전제(專制)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지 않으므로 폐지하여야겠다는 안이 나오자 만장일치로 폐지가 가결되었고,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한 조선불교도 총회에서는 조선불교계 통일기관으로 총무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65)

  곧이어 불교유신회에서는 통일기관 유지를 위해 총무원 사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임시원장 한 사람, 부장 두 사람, 부원 네 명을 두기로 하고, 재정통일 문제는 전도(全道) 900여 사찰의 전 재산을 3등분으로 나누어 3분의 1은 그 절 유지에 쓰기로 하고, 3분의 1은 그 지방의 포교와 교육사업에 쓰고, 나머지 3분의 1은 경성(京城)에서 조선 전도 사찰(朝鮮 全道 寺刹)을 대표한 불교사업에 쓰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이 때 선임된 임시원장은 곽법경(郭法鏡), 이무부장(理務部長) 오성월(吳惺月), 서무부장(庶務部長) 이회광(李晦光), 부원(部員)으로는 유석규, 황경운, 임석진, 김지현(劉碩規, 黃耕雲, 林錫珍, 金智玄)이 선임되었다.66)

  1월 14일에 열린 임시총회에서 사무부장 이회광(李晦光)은 사퇴하고, 그 후임으로 조영래(趙永來)가 당선되었으며, 자문기관으로 설치한 의사회(議事會)의 의사원으로 강도봉·기석호·정광진·강신창·이지광·박한영·김석두(康道峰·奇石虎·鄭光震·姜信昌·李知光·朴漢永·金石頭) 등 7명이 당선되었다.67) 아울러 종헌을 제정하고, 1922년 3월 24일 각황사에서 총회를 열어 불교개혁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26일에는 교헌을 통과시킬 예정이었으나 그 날 '명고사건'이 발생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이렇듯 불교유신회에서는 자체적으로 불교계의 문제들을 정리하려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2일에 속개된 30본산 주지 총회에서 임시의장 홍포룡(洪蒲龍)은 금번 불교도총회에서 결의된 통일기관 문제와 재정통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사찰령에 위반되는 듯한 말을 하였고, 돌연히 총독부 학무과장 마쯔무라(송촌(松村))가 두어명의 수원(隨員)과 함께 출장하여 방청을 일체 금지하고, 비밀리에 무슨 훈화가 있어 회의는 전에 없는 살풍경으로 화하였다.68) 이러한 상황에서 시바다(시전(柴田)) 학무국장은 불교유신회에서 제기한 일련의 개혁안에 대하여 "불교유신회는 당국에서 법령으로 인정한 회가 아니고, 사사로이 연 회의요, 불교총회에서 결의한 것도 사사로이 연 회의에서 한 것이니 당국에서는 간섭을 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금번 주지총회는 법령으로 인증한 회이므로 만일 청년중에서 회의를 방해하는 일이 있으면 경찰권의 발동하여 제제를 가하겠다"69) 라고 하여 불교유신회를 탄압하고, 주지총회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총독부 세력과 결탁된 관변측 주지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서 통도사 승려 강신창(姜信昌)은 반대편 승려라고 지목하는 월정사 주지 홍포룡과 유점사 주지 김일운(金一雲) 그리고 30본산연합사무소에서 사무보는 이혼성(李混惺)에 대하여 "금번 총독부의 관력(官力)을 빌려 유신회원을 압박하고 불교의 체면을 유지할 수 없는 결의를 하였다"고 비분강개한 말로 논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대편은 "우리가 관력(官力)을 빌려서 유신회를 압박한 것이 아니라 유신회의 공격으로 회를 정리할 수 없으므로 총독부에 가서 우리의 힘으로는 회를 할 수 없으니 모두 돌아가겠다고 했더니 그들이 자진하여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작일 결의 중에 제일 불행한 것은 동광고등보통학교를 폐지한 것이나 우리도 자유가 없는 터인 즉 어찌할 수 없다고 하였다.70) 관변측 주지들은 총독부의 지시를 받아서 움직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불교계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흐름을 저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0본산에서는 동광학교(東光學校)와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그동안 운영하여왔으나 동광학교에 대해서 설립인가를 신청하였으나 설립인가가 나오지 않자 30본산 주지회의에서 동광학교 폐교를 결의 하였다. 이소식을 들은 동광학교 학생들은 학교가 폐교되기 전에 일제히 동맹휴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총무원 측에서는 임시총회를 열어 총무원을 지지하는 10본산71)에서 각 사찰 재산의 3분의 1을 내어서 동광학교와 신명학교를 경영하기로 결의하고, 서약서를 만들어 서명 날인하였다.72) 이 동광학교는 후일에 성립되는 교무원이 재단법인으로 인가되면서 교무원으로 넘어가서 재단법인화 되어 운영되게 된다.73)

  총무원은 1923년 6월 22일 대전(大田)에서 총무원의 중심이 되는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 범어사주지 김경산(金擎山)· 송광사 주지 김찬의(金贊儀)· 고운사 주지 이만우(李萬愚)· 석왕사 주지 대리 장하응(張河應) 등 17명이 모여서 본래 천도교측에서 운영하다가 재정난에 봉착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경영하기로 하였다.74) 그러나 총무원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불교 교리를 전파하려는 총무원측의 입장과 천도교측에서 임용한 기존의 교원들 사이에 교리문제로 갈등을 겪었고, 곧 운영난에 봉착했으며, 1924년 4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하자 보성고등보통학교는 동광학교와 통합되었다.

  조선총독부측에서는 자주적이고 독자적으로 조선불교계의 모순들을 극복하면서 발전하려는 총무원의 노선이 못마땅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는 1922년 5월 24일 경에 30본산 주지들을 불러모아 총회를 개최케 하고 이 회의에 참석할 26본산 주지들을 불러서 무엇인지를 지시하였는데 주지들이 의론할 내용은 종래 30본산연합제도를 폐지하는 동시에 지난번 10본산에서 설립한 총무원도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을 세워서 불교사업을 하라는 것이었다.75)

  조선총독부의 이런 지시를 받은 30본산의 주지들은 5월 27일 총회를 열어 이미 설립된 불교총무원 의사회에서 의사중 다섯명이 발언권을 요구하였던 바, 주지회의에서는 한사람의 발언권만 허락하였고, 참석이 허용된 한사람으로부터 금번의 회의를 주지총회로 하지말고 불교총회로 하자는 의견이 진술되었으나 채택되지 않았으므로 퇴장하였다. 통도사 주지 대리 황경운(黃耕雲)은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의 위임장을 가지고 참석코자 하였으나 그 위임장이 주지총회에 참석할 것을 위임한 것이 아니라 불교총회에 참석할 것을 위임한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총독부로부터 총무원을 폐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주지 총회에서 출석 인원 가운데 진보적인 노선의 주지들의 참여 자체를 봉쇄하였던 것이다.76) 이어서 중앙기관 설립문제를 토의한 결과 경성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을 두고 30본산 주지 중에 전임이사(傳任理事) 5명을 두고 서무·교육·포교·재무·사교부(庶務·敎育·布敎·財務·社交部)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되 임기는 2년으로 하였다.77)

  이어서 같은 날 오후에 속개된 회의에서 불교사업 경영을 위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할 문제를 토의하고자 하는데 지난번 10본산으로 설립된 총무원 의사회(議事會)에서 대표 다섯사람의 발의로 30본산연합제규를 폐지하였은 즉 일반 불교도들까지 합석하여 일을 처리하여야 할 것인데 주지들만으로 결의하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하여 주지 불신임안을 제출하였으나 주지회의에서는 받을 필요가 없다하여 그대로 회의를 진행하여 재단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78)

  교무원 측에서는 1922년 5월에 개최된 30본산주지회의에서 결의된 60만원 재단법인 설립문제를 계속 추진하여 동년 10월 15일에 당시 총무원을 운영하던 통도사·범어사·석왕사를 제외한 금용사(金龍寺) 주지 김혜옹(金慧翁) 등 27개 본산 주지들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을 신청하여 1922년 12월 30일자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인가를 받았다.79)

  30본산 주지회의는 5월 29일에도 계속되었는데 범어사 주지 오성월(吳惺月)이 금번 회의는 일반 승려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연합제규를 폐지하였는데 일반 승려의 여론을 무시하므로 참석할 수 없다고 탈퇴하였다. 30본산 주지회의는 총무원 측을 배제한 가운데 회의를 진행하여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대한 규칙을 통과하고 불교사업을 위하여 중앙교무원을 60만원의 재단법인으로 조직하되, 조직방법으로는 전조선 사찰의 소유 지가(所有 地價) 오분지 일을 내어 땅을 팔든지, 삼림을 팔든지 내년 3월 말일 안으로는 완전히 돈을 모아 기본금을 적립시키기로 결의하고, 그 다음 포교에 대한 건은 각황사에 포교사 한 사람을 두고 일요일 마다 아침 저녁으로 전도를 하고 때때로 불교에 대한 강연을 할 터이며 차차로 보아 포교사 양성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80)

  5월 30일에 열린 30본산 주지회의에서 의사진행을 할 때 석왕사(釋王寺)는 참석치 아니한다는 청원이 있었으며 어제 결정된 중앙기관 교무원이 재단법인으로 조직되기전에 우선 준비 사무를 진행하기 위하여 이사 5명과 감사 3명을 선임81)하고, 내년도 예산 편성을 위하여 김정해(金晶海) 외 4명의 예산편성 위원을 선출하였다.82)

  조선불교계가 총무원과 교무원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거듭하는 가운데 급기야 통도사·석왕사·송광사(通度寺·釋王寺·松廣寺)를 제외한 27본산연합으로 성립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재단법인을 조직한다하여 1922년 12월 28일자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1923년 1월 18일에는 30본산 주지 총회를 총독부 학무국에서 열고 아리요시(유길(有吉)) 정무총감과 나가노(장야(長野)) 학무국장의 훈시까지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83) 30본산 주지 총회를 30본산연합사무소가 아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개최한다는 것은 당국에서 만사를 간섭하여 불교계의 자유의사를 무시할 염려가 있었다.

  통도사·범어사·석왕사 세 본산은 총무원을 설립하고 그 이외의 27본산은 조선불교 교무원을 설립하여 피차 서로 반목하던 중에 교무원에서 총독부 학무국의 양해를 얻어 재단법인 설립에 관한 허가를 얻어 동광고등보통학교를 경영하고 기타 사업을 집행할 계획이요, 총무원도 불교학원을 경영하고 기타 교화사업을 구상하면서 교무원과 대립 중인데 두 단체가 모두 각황사 내에 사무실을 두었던 바, 교무원 측에서는 총무원에 대해서 우리가 인정치 않는 단체이므로 각황사에 있는 사무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였고 총무원에서는 각황사를 건축할 때 총무원 측 본사에서도 비용을 부담했으므로 우리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 라고 하면서 교무원이 총무원을 인청치 않으면, 우리도 교무원을 인정치 않는다고 맞서서 물러서지 않았다.84)

  교무원 측에서는 급기야 최후 통첩을 내고 기다리다가 2월 24일 간부 몇 사람이 총무원을 찾아가서 실력으로 퇴거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일어나서 총무원 측에서는 김혜광·양무홍·김한주·이종천(金慧光·梁武弘·金漢柱·李鍾天) 등과 교무원 측에서는 곽법경·최종식·맹현우(郭法鏡·崔鍾植·孟玄愚) 등이 종로경찰서에 붙들려 갔다. 교무원 측에서 총무원의 간판을 도끼로 깨뜨려 버렸고, 총무원 측에서도 교무원 간판을 도끼로 깨뜨려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85)

  총무원은 교무원 측을 상대로 종로경찰서에 서류원을 제출하고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고소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교무원 측은 경성 지방법원 민사부에 총무원이 점거하고 있는 각황사 건물을 내놓으라는 명도신청을 제기하는 것으로 맞섰다. 경성 지방법원에서는 6월 18일 총무원 사무실이 교무원 소유라는 것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고소를 기각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86)

  총무원은 민족적·민주적·독자적인 노선을 가지고 혁신적인 젊은 승려들을 중심으로 성립하였으며, 교무원은 총독부의 사주를 받아 성립된 친일 본산 주지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조건하에서 성립된 현저한 성격 차이로 인하여 많은 갈등들이 표출되게 되었다.


2)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

  조선총독부에서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를 통하여 조선불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총무원의 태도에 일종의 위협을 느꼈던지 30본산 주지들을 모두 불러모아 총무원을 폐지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을 설립할 것을 지시하였다.87)

  조선총독부로부터 이러한 지시를 받은 30본산 주지들은 1922년 5월 28일 총회를 열어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불교계의 통일기관으로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전임이사 5명을 선출하였고, 이어서 5월 29일 30본산 주지총회에서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60만원 재단법인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 목적은 '조선불교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종교 및 교육사업을 시행하고, 조선사찰 각 본말사의 연합을 도모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사에는 해인사(海印寺) 주지(住持) 이회광(李晦光)· 용주사(龍珠寺) 주지(住持) 강대련(姜大蓮)· 위봉사(威鳳寺) 주지(住持) 곽법경(郭法鏡)· 유점사(楡岾寺) 주지(住持) 김일운(金一雲)· 대흥사(大興寺) 주지(住持) 신경허(申鏡虛) 등 5명이었다. 설립자본금은 모두 621,795원 51전(錢)이었으며 실제불입금은 156,384원 80전이었다.88) 조선총독부는 설립자본금이 다 불입되지도 않은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설립을 인가하는 아량을 보였다. 이것은 그들의 통치정책이었던 민족분열책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에 설립자본금이 다 불입되지 않아서 재정 부족 현상이 지속되다가 1927년에 이르러 전국 각 사찰의 토지를 양여 받고 이것을 총독부로부터 승인을 받아서 비로소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 재단이 구성되었다.89)

  조선불교교무원에서는 재단설립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가던 무렵에 일본 임제종 묘심사(臨濟宗 妙心寺) 승려 가미야 소이치(신곡종일(神谷宗一))를 고문으로 영입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총무원 측의 박한영(朴漢永)은 불교유신회를 대표해서 일본 승려를 고문으로 초빙한 것은 아무리 전조선승려를 무시하고 일반 사회의 주목을 불구한들 나날이 새로워지는 현대 사회에서 누구를 기만할 것이며, 누가 기만을 당할 것인가라고 묻고 굳이 고문이 필요하다면 전조선인불교도 중에서 자격이 있는 사람 없지 않을 것이라고 교무원측이 재단법인을 만들면서 일본승려를 고문으로 초빙한 사실에 대하여 비판하였다.90)

  총독부 학무국의 간섭으로 성립한 교무원에 경남의 세 본산 즉, 해인사·통도사·범어사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몇몇 본산이 참가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도사의 경우 1922년 연말에 마산 포교당에서 개최된 본말사 주지 총회에는 본말사 청년 45명이 참석하였는데 경남도청에서는 학무과장이 출석하여 재단법인 교무원에 가입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출석한 청년들은 몇몇 승려의 야심으로 성립한 재단법인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교무원의 재단법인 성립을 부인할 것을 결의하고 즉석에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91)

  그 결의문 취지의 대략은 금년 5월 25일에 몇 사람 주지들은 조선승려들이 모여서 개최한 조선불교대회를 무시하고 학무국과 경관의 입회 아래서 재단법인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재단법인을 조직한 교무원 당국자가 인격이 있어 일을 하여 나갈 여망이 있으면 일반 교도의 여망을 무시한 죄를 용서할 수 있으나 그 간부들은 십여년 동안 사사로운 권리만 경쟁하고 시기 질투와 음란만을 일삼는 자가 있고, 우리가 연대책임이 있는 일을 우리들의 방청까지 금지하고 이루어진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92)

  유점사에서는 12월 15일 교무원에서 결정한 재단법인 참가에 대한 회의를 열었는데 강원도청 학무과장과 고성군청속(高城郡廳屬)과 유점사 부근 주재소 순사 일동이 모두 출장하였으며, 주지 김일운(金一雲)은 본말사 승려에게 재단법인 참가를 권유하였으나 승려 일동은 재단법인이 일반 교도들의 공론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주지 몇몇 사람이 결정한 것이라서 참가치 못하겠으며 결국은 본말사 주지가 어떤 세력을 빌려서 결정 한 것이라 하여 주지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93)

  비슷한 사례는 안변 석왕사(安邊 釋王寺)에서도 일어났다. 석왕사에서도 본말사가 모여서 교무원에서 결의한 재단법인 가입 문제를 토의한 결과 재단법인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최서호는 1924년 3월 21일자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앞으로 보낸 진정서에서 "당국 명령 재단법인을 몽매한 관경(管見)으로 조(早)히 복종치 아니하였다가 1922년 12월 28일 도청에 들어가서 재단법인을 찬성하고자 날장(捺章)하고 환산(還山)하온즉 일산중제승(一山中諸僧)이 일장제명(一章諸名)하고, 1923년 1월에 본산내에서 불신임안을 받았으며, 2월에 주지 사면(辭免)을 권고하기에 청년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사면하였으니 당국의 명령(命令)에 순종(順宗)하려다가 원통한 일을 당하였으니 예전처럼 주지 사무를 이행케 해달라"고 하고 있다.94)

  조선총독부에서는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성립되는데 끝까지 반대했던 세 사찰 즉 통도사·범어사·석왕사의 주지를 임명하는데 있어 경성의 학무국장과 해당 도(道)의 도지사(道知事) 사이에 여러 차례 공문을 통하여 세 사찰 주지들의 배일사상을 검증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주지 임명이 지연되었다.95)

  총무원은 총독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력과 천도교측으로부터 인수한 보성고등보통학교의 운영난 등 중첩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1924년 4월 3일에 총무원과 교무원은 대타협을 이루어 30본산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통합되었다.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통합이 이루어진 직후에 총무원측의 통도사 주지 김구하(金九河)와 범어사 주지 오성월(吳惺越) 새로운 이사로 영입하여 모두 7명의 이사로 증원되었다.96) 불교계의 개혁과 유신을 목적으로 출범했던 총무원은 2년 3개월만에 문을 내렸다.

  총무원측을 포함해서 통합을 이루어 낸 중앙교무원은 총무원 측의 보성학교와 교무원에서 운영하던 동광학교를 통합하여 운영하고, 1922년에 강제 폐교되었던 중앙학림을 전문학교로 승격시켜 운영하는가 하면, 권상로로 하여금 『불교(佛敎)』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 면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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