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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스출처 - 불교와 여성

서용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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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여성

 

李 昌 淑(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1.

석가모니 부처님은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여 남성과 같이 정신 세계의 동참자가 되게 하였다. 이로서 인도 여성 사회에는 변화가 왔었는데 그 전통은 불교가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 우리 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전래 초기부터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하면서 여성들의 삶에는 변화가 왔었다. 불교는 역사 속에서 한국 여성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 한국의 여성 불자가 열어가야 할 새로운 흐름을 모색하기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 여성들의 불교적 삶을 살펴보고, 그것을 오늘의 귀감으로 삼으려 한다. 그 기초로서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에서 여성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으며, 초기 불교에서 인도여성들은 불교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켰는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오늘 이 시대의 한국의 여성불자들, 여기 모인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불교에서 여성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가. 불교의 여성관은 그 근원은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불교사상의 전개 및 그 전개의 배경이 되는 교단 및 사회적인 속성과 궤를 같이 하며 변천하였다. 인도의 불교를 시대에 따라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로 나누는 통례에 따라 각 시대에서 여성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원시경전에서 부처님의 언설로서 표현된 여성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의 양면이 있다. 부처님은 여성에 대해 묻는 제자 아난다의 질문에 대해 "여자는 자재력이 없다. 여자는 질투가 많다. 여자는 지혜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는 공석에 못나가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며 행위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대답하고 있다. 반면 코살라의 파세나디왕과 같이 있던 자리에서 왕비가 딸을 낳았다고 소식을 전하자 왕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을 보고 왕에게 "왕이여 딸이 아들보다 더 나은 자식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자라서 현명하고 덕이 있으며 시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진실한 아내가 된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위대한 행동을 할 수도 있고 거대한 왕국을 통치할 수도 있다. 고상한 아내의 그와 같은 아들이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옥야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일련의 경전에서는 "여인신(身)중에 십악사(十惡事)가 있다"고 하고 있는데 그 십악사라는 것의 내용은 당시 인도사회가 여성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즉 당시 인도에서는 자식은 현세를 위해서나 내세를 위해서나 꼭 필요한 존재였는데 그 자식의 범위 안에 딸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딸을 낳는 것은 거의 저주나 재앙으로 여겨졌다. 이런 남아선호 사상에서 딸을 부담스러워하는 당시의 인식이 원시경전에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 즉 여성을 남성과 같은 도기(道器)로 보느냐 안보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부처님은 여성을 인정했다. 부처님의 양모였던 마하파자파티 고타미가 석가족의 여인 5백 여 명과 함께 와서 출가하여 도를 닦으려 하니 여성들도 교단에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은 처음에 세 번 이에 대해 거절하였다. 세 번씩이나 거절을 당하고도 물러나지 않고 덥고 먼지 많은 먼길을 다시 찾아 온 이들 여인들을 애처럽게 여긴 아난다가 부처님에게 여인들의 간청을 들어주실 것을 청하자 부처님은 이번에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아난다는 "여자들이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으면 수다원과 내지 아라한과를 받을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즉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여성들은 출가하여 수행해도 성도할 수 없기 때문인가 하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여성들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여성을 도기로서 긍정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비구니가 비구를 공경해야 할 8가지 계율을 설정하였다고 여러 경전과 율전이 기록하고 있다. 이 계율이 비구니팔경법(比丘尼八敬法)으로서 교단 내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로 오래동안 존속되어 온 것이다. 이 비구니팔경법은 식차마나(式叉摩那), 육법(六法), 이부중(二部衆) 등의 말이 바야흐로 비구니 출가를 허락하는 시점에서 나오고 있는 등 부처님이 설정한 법이라고 보기에는 몇 가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다. 비구니교단이 성립된 후 여성이 출가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비구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들이 경전과 율전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여성을 교단에 받아들여 남성과 같이 정신 세계의 동참자가 될 수 있도록 한 이 결정은 불교사내에서 여성의 위치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획이 된다. 당시 인도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생각할 때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시대의 인도 남성들은 여자를 신분에 있어서 남성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바라문교권제도 아래서 엄격했던 카스트제도를 부정했던 부처님의 평등사상이 가능케 한 것이다. 여성에 대해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부처님의 언설을 들어 부처님이 여성을 차별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부파불교에서는 여자에게는 오장(五障)이 있다고 한다. 여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과 마왕(魔王)과 전륜성왕(轉輪聖王)과 부처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이다. 불설초일명삼매경(佛說超日明三昧經)에서는 여자가 이 다섯의 인격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하고 있는데 요점은 여자의 성품이 천박하고 수행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파불교에 이르러 부처님에 대한 탐구는 과거불(過去佛) 사상을 낳았다. 부처님과 같은 인격은 왕자로 태어나서 출가하여 6년간의 고행만으로는 이룰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동안 유정류(有情類)로 태어나서 윤회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부처님 밑에서 수행하고 이타행(利他行)을 베푼 결과로서 금생에 부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부처님의 과거세의 행적을 말하는 본생담이 만들어지고 부처님 이전에도 이러한 인격이 있었다는 과거불 사상이 생겨난 것이다. 부처님의 전생의 수행시대(보살시대) 가운데 제2의 수행시대에 속하는 백겁수행시대에 석가보살은 그 수행의 결과로서 남자로 태어나며 32가지의 묘상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32상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32상 가운데 제10상인 음마장상(陰馬藏相)은 여래의 남근이 말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인데 여자에게는 남근이 없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는 32상을 구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의 여성관으로 여인오장 가운데 하나인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근거는 이 32상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부파불교 시대에 불교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부처님 재세시에 비해 상당히 저하된 것이었다. 부처님에 의해 향상되었던 여성의 지위는 부처님 입멸 후 서서히 저하되어 갔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쓰여진 [밀린다팡하]에는 비난받아야 하고 경멸당해야 할 10종류의 사람 가운데 "남편이 없는 여자"가 첫번 째로 꼽힌다. [장노니게(長老尼偈)]에서 보여준 여성상과는 아주 다른 여성관이다. 불신관(佛身觀)의 변화와 하락한 여성의 지위가 맞물려 여인오장(女人五障)과 같은 것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남성에게도 부처님과 같은 성불의 도에는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이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크게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 보살사상과 여래장(불성)사상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사상이다. 대승불교의 주체자는 보살이며, 누구라도 보리심을 일으키면 보살이 될 수 있고, 보살이 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을 쌓아가면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근거는 일체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기 ?문이다.

초기 대승경전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대승불교의 지지자로 표현되고 있다. 선남자·선여인이라는 말이 대승경전의 도처에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승교단에서 여성의 지위는 부파불교의 그것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교리적으로도, 교단적으로도 부파불교에서 말한 여성의 불성불(不成佛)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에 직면했다.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이에 대해 여자는 남자의 몸으로 변해야 성불할 수 있다는 변성남자성불설(變成男子成佛說)이 나온다. 변성남자성불설은 여러 경전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오는데 그 가운데 법화경의 변성남자성불은 법화경이 가지고 있던 대승경전상의 비중에 힘입어 가장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대승의 교리에 입각해 볼 때 변성남자성불설은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승교단은 왜 변성남자성불설과 같은 것을 만들어냈을가. 대승경전이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르러 완성된 마누법전에서 여성은 모멸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당시 인도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알 수 있다. 변성남자성불설은 여자를 멸시하는 힌두사회를 배경으로 했던 대승교단이 그 사회와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설정한 타협안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중기 대승경전 가운데 재가의 신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마경(維摩經)과 승만경(勝?經)에서는 여자의 몸으로도 성불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여래장사상을 말하고 있는 승만경에서는 설법의 주체가 불타가 아닌 재가의 결혼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여주인공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여 부처의 지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인 승만부인은 대승보살도를 천명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장차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으며 그 성불의 수기를 자신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대승 보살도를 실천하는 선남자와 선여인, 즉 일체 중생에게 확대하고 있다. 승만경은 불교경전 가운데 여성의 위치를 가장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경전이며 승만부인은 가장 이상적인 불교의 여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불교의 여성관은 불교사상의 전개에 따라 변천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교조인 부처님이 도기로서의 여성을 차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교의 여성관의 핵심이 된다고 하겠다.

 

3.

부처님의 교화가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나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문헌으로 [장노니게(長老尼偈)]가 있다. [장노니게]는 [장노게]와 함께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니들과 비구들의 게송을 모아놓은 초기 불교문학작품이다. 부처님 재세시부터 후의 아쇼카왕 시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2,3백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기원전 80년경에 문자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보수적인 남성 중심의 교단에서 이 기록들이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졌다는 것은 초기의 불교인들이 이 문헌을 성전에 넣을만큼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며, 그것은 다시 말해 당시의 비구니들의 위상이 결코 낮은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비구니를 포함하여 73명의 비구니의 게송 522수가 수록되어 있다.

[장노니게]에 나타난 당시의 여성들의 생활상은 "육신을 굽게하는 세가지-절구통, 절굿공이, 그리고 포악한 남편"이라는 말이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성은 단지 그 필요에 의해서만 가치가 있다가 없어지곤 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끝없는 육체 노동과 가난, 그리고 편견에 시달리고 있었음이 게송의 여러군데에서 나타나고 있다. 게송의 작자 가운데는 한 남자를 남편으로 했던 모녀도 있었고,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그 빚을 갚기 위해 첩이 되었던 여성도 있고 기생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들 여성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첫째, 장노니들은 교단에 들어오면 그들이 속해있던 카스트를 초월하여 "여래의 딸"로서 존재하게 된다. "나는 여래의 아들"이라는 비구의 자각에 대하여 "나는 여래의 딸"이라는 자각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것은 당시 일반 사회의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던 평등권이었다. "비구니팔경법"이라는 석연치 않은 계율을 수지하겠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비구니교단이지만 그들이 세속의 삶을 청산하고 불법 안에 귀의하면서 그들은 평등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장노니들의 게송 어디에서도 아라한이 된다는 최고의 목표에 대한 의심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여성이기 때문에 아라한이라는 목표를 가질 수 없다든가 하는 자기비하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딸, 아내, 어머니라는 여성의 역할에서 오는 제약이나 고통에 대한 호소는 있으나 여성에 대한 본질적인 열등감은 없다. 뿐만 아니라 "바르게 진리를 관찰하는데 여인이라는 점이 무슨 장애가 되겠는가"라는 당당한 의식도 보여주고 있다.

둘째, 부처님이 출가와 재가,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가르친 근본교설들이 비구니들의 게송에서도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사성제, 8정도 등의 근본교설들이 이들에게 설해졌음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교단의 평등성은 설법의 내용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비구니들은 사성제라는 진리에 가장 많은 감화를 받고 있었다.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 고통을 없애려면 어떤 수행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며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외치는 비구니가 적지 않다. 장노니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어야하는 고통과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 즉 이중고에 대해 토로하고 있으며 그 고통의 원인은 잘못된 견해와 욕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장노니게]의 영역본에서 서문을 쓴 리스 데이비스는 장노니의 시에서 성취된 목표가 "해방", "자유의 획득" 등으로 마음에 그려진 비율(23%)이 장노의 시에서 이에 일치하는 비율(13%)보다 높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그 "자유의 획득"이나 "해방"은 죽음과 재탄생의 순환인 윤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들이 아라한의 과위에 올랐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며 많은 여성들이 아라한의 과위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넷째, 장노니게에는 2명의 재가 여성이 과위에 오른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들은 과위에 오르자 마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이러한 사실로서 원시불교에 있어서 재가여성의 성도를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성도가 출가자만의 몫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전래된 이래 불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성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 조선의 불교가 각각 그 성격이 다른 것과 같이 불교내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나 역할, 또는 신앙 형태도 각각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신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에 불교에서 여성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신라에서는 전래 초기부터 왕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불교의 수용에 참여했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이 흥륜사를 일으킬 때 그 왕비도 왕과 같이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어 영흥사를 개창했다. 이 때는 불교가 공인된지 불과 8년 밖에 안되는 시기로서 왕비에게 상당한 재량권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사실이다. 다음 대인 진흥왕의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았다. 이들 두 왕비의 행적은 신라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되며 뒤이어 비구니가 되는 여성들이 많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진흥왕 12년 고구려에서 온 혜량법사를 국통(國統)으로 삼으면서 국통의 다음 직급에 해당하는 승직에 도유나낭을 두고 비구니를 임명하여 비구니들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통솔할 만큼의 비구니가 있었으며 비구니의 지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위덕왕 24년 경론과 율사와 선사 등을 일본에 파견할 때 비구니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평원왕 때 법명비구니가 일본에 가서 일본 비구니의 교육과 수계를 담당했다고 한다.

특기할 것은 승만경이 신라에 전래되어 신라 상류층 여성들의 신앙에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진흥왕 37년 안홍법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가져온 승만경은 신라 여왕의 이름에 그 주인공의 이름이 쓰여질 정도였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며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성여왕의 이름은 만(曼)이다. 만의 한자 표기가 다르기는 하나 이는 승만부인을 염두에 두고 지은 돌림자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승만부인의 도덕성과 천부적인 변재는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자질로서 신라 왕실의 찰제리종 의식을 충족시키기에 승만경은 충분히 매력있는 경전이었을 것이며 이런 인식에서 승만부인의 이름을 따서 여왕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특히 세명의 여왕 가운데 선덕여왕은 그 인품이 승만부인을 연상시킨다. 황룡사9층탑을 세우는 등 불교적 치세 이외에도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위문 구제하고 죄수를 사면 하는 등 승만부인이 10대수에서 말하는 대승 보살의 행을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機三事)나 여왕을 사모하는 평민에게 팔찌를 벗어주는 일화 등에서 대승 보살의 지혜와 자비심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신라불교에서 여성은 여신성불의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으며(삼국유사권제5 郁面婢念佛西昇), 수행자를 시험하고 경책하는 선지식이기도 하고(삼국유사권제3 南白月二聖 努?夫得 ??朴朴·삼국유사권제5 廣德 嚴莊), 어머니의 신앙심으로 아들을 출가시키거나 눈먼 자식의 눈을 뜨게 하는(삼국유사권제5 眞定師孝善雙美·삼국유사권제3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등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불교적 경지에 있어서 남성과 동등한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는 여성이 많다.

고려 여성에게 있어서 불교는 차원 높은 종교라기 보다는 생활의 일부였던 것 같다. 고려 양반 여인들의 묘지(墓誌)를 통해본 당시의 신앙생활은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습속화되어 그것이 생활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불서를 읽고 낮에는 방적에 골몰하다가 밤늦게 다시 불경을 외우며, 금강경이나 화엄경 같은 특정한 경전을 매일 읽는 이도 있었다. 불교의 계율에 따라 술과 고기를 금하기도 하고 많은 아들 가운데 한 둘은 비구로 출가시키고 시주로서 절에 보시를 하고, 재(齋)가 있을 때는 버선을 만들어 스님에게 보시하는 풍속도 있었다. 임종에 즈음하여는 비구니가 되어 숨을 거둘 때까지 아미타불을 불렀다는 기록이 많았다. 장례는 대개 불교식으로 치뤘고 화장하는 일은 예사며 집 근처의 절에서 다비했다.

국가적 외호(外護)가 지나쳐서 사원이 경제적으로 비대해지고 기복양재(祈福攘災)에 치우친 불교행사가 많아지면서 고려 불교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데 여성들도 지나친 신심으로 집과 많은 재물을 절에 바치고 비구니가 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현종 8년에는 집을 내놓아 절로 하는 일과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하는 정도가 되었다. 길흉화복에 흔들리기 쉬운 심성을 이용하는 요승들도 나왔고 이에 경도되어 불사에 붸아다니며 여성들이 추태를 연출한 기록도 보인다.

왕건의 비(妃)였던 자매가 뒤에 비구니들이 된 것을 비롯해 공민왕의 비(妃)들도 공민왕이 시해된 뒤 비구니가 되는 등 비구니가 되는 기록들이 보이는데 불교사회에 공헌한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나 승직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으며 그 지위도 신라 사회와는 달랐다. 이렇게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고려사 편찬자의 유교적인 편견이 작용한 영향도 있으리라고 본다.

조선시대에 오면 유학이 통치 이념이 되고 불교는 정치, 사회적으로 그 영향력을 잃게 되는데 그러나 여성들은 유교보다는 불교에 더 가까웠던 것 같으며 조선불교가 산승불교(山僧佛敎)로 그 명맥을 유지한 데는 여성들의 신심이 힘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적인 제제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신앙활동과 불교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태종은 즉위 후 왕 자신이 "나라에서 행하는 불사는 내가 이미 파하였으나 궁중의 부녀들이 그 아들의 수(壽)를 연장하기를 바라면서 사재를 써서 예참을 베풀거나 수륙재를 행하니 금하고자 해도 금할 수가 없다 "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여성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세종11년에는 부녀가 절에 가는 것과 승려가 과부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조선 초기 역대왕들은 여성들의 불사에 대하여는 강·온의 양면 정책을 쓰며 극단적인데 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왕실 여성들의 불교에 대한 열의는 특기할만한 것으로 성종 때 인수대비는 불교를 옹호하는 언문교지를 내렸는데 그 주장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 가운데 있는 "역대 제왕이 불교를 배척하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것은 인심이 동요할 것을 걱정해서이다"라는 내용과 같이 불교를 비공식적으로 묵인하는 효과는 있었을 것이다. 명종 때의 문정대비는 불교를 정책적으로 일으키려고 시도하여 승과를 부활하고 퇴락한 사찰을 복건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문정대비가 돌아간 후 불교의 부흥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이런 노력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으니 서산대사는 문정대비가 부활시킨 승과에 급제하여 산승불교의 법맥을 유지시킨 조선시대의 고승인 것이다. 국가의 기본 정책이 유학에 있기 때문에 불교와 관련된 사건이 조금만 있어도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는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혼자만의 신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 사회적으로 의견을 피력하고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이들 왕실여성에게서 한국 불교 여성의 정신력을 엿볼 수 있다. 법흥왕비에 이어 선덕여왕, 그리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의 인수, 문정 양대비에 이르는 상류층 여성과 이름이 회자되지는 않지만 그 정신 수준에 있어서는 수행자를 능가하는 신라의 여성들, 그리고 불교를 생활화 했던 고려의 재가 여성들은 이 시대 여성 불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선조들인 것이다.

 

5.

오늘날 여성 불자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불교 내에서 여성 불자의 위상, 즉 신앙 형태와 성차별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일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 불자의 입지에 대한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불교내에서 여성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여성 불자는 한국 불교 내에서 우선 숫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재가 불자의 70∼80%가 여성이며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인 조계종 내에서 비구니는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불교를 떠받치고 있는 저력은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숫적으로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역할도 점점 증대해 가고 있다.

우선 비구니의 경우 수행과 포교에 있어서 그 활동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전통 사찰의 강원과 선원에서 교학과 참선 수행에 정진하는 외에 국내 대학에서 또는 외국유학을 통해 교학을 연찬하는 비구니들이 늘어나고 있다. 도심의 포교당을 운영하고 유치원 운영에도 참여하며 사회복지 사업에도 적극적이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강의하는 비구니의 학생이 비구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종단 내에서 비구니는 이에 상응하는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조계종의 경우 비구니를 교단적으로 관리하는데 비구니가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아직까지 없으며 비구니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종회인데 종회의원 81명 가운데 비구니에게 배당된 수는 10명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비구니팔경법을 주장하는 비구들이 있다. 이 비구니팔경법은 현실적으로 사문화 되다시피 하였고 또 사문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데도 필요할 때는 비구니를 통제하는 기능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가의 여성 불자들은 불교 내에서 사찰 외호의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해내면서 간경, 참선, 염불, 진언 등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정하여 행하고, 한편 사회 봉사, 불교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여성 불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신앙의 내용이 아직까지도 대다수가 "기복적"인 것에 머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 불교에 있어서 기복성은 오늘의 문제 만은 아니며 그것은 한국 여성 불교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조계종에 등록되어 있는 불교 교양대학의 숫자는 64개인데 참여자의 다수가 여성이다. 여성 불자들 사이에서 불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알아야 하겠다는 지적 욕구가 확산되어 가고 있으나 아직까지 불교 교리 내지 사상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것도 문제점이다. 한국불교는 "큰스님 불교"라는 어느 학자의 지적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보다는 스님의 가르침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스님이 선승이면 선리(禪理)가 불교의 전부로 알고 그 스님이 학승이면 교리가 전부인 것으로 알아서 나무만 보고 숲은 못보는 것이 불교 교리와 사상에 대한 여성 불자의 대체적인 수준이다. 여성 불자이면서 불교의 여성관에 대한 바른 인식조차도 없어서 변성남자 성불설과 같은 것이 불교 여성관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는 여성 불자가 대부분이다.

여성의 신앙 형태가 이렇게 되고 있는 데에 그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1913년에 발표한 한용운(韓龍雲)의 [불교유신론] 가운데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 불교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집고 있었다. 그 내용을 오늘의 한국 불교에 대비시켜 볼 때 그동안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여성 불자의 신앙 형태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음 일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여성 불자의 입장은 어떠한가.

60년대 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성운동의 이념은 U.N.이 정한 [여성의 해](1975년)를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고 그 이후 20여년간의 여성들의 노력으로 사회적인 여성의 지위는 향상해 가고 있다. 또한 여성문제 내지 사회문제에 여성들은 기민하게 대처해 가고 있다. 이에 비해 불교 여성들의 여성운동적인 활동은 미약한 단계에 머물고 있다. 여성 지도자의 부재와 결집성의 부족이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여성불자의 단체는 불교 내에서 여성의 입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해야함과 동시에 일반사회의 여성 단체, 시민단체, 또는 다른 종교의 여성 단체들과 연대를 갖고 여성문제, 사회문제의 해결에 일익을 담당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것은 시대의 추세이다.

다방면에서 남녀 평등이 이뤄져가고 있는 시기에 불교가 이 시대에 맞는 종교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다하려면 불교 교단과 불자가 남녀평등관에 입각한 불교관을 정립하며 그에 맞는 신행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몇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여성 불자 자신들의 정체성의 확립이다. 불교는 자각의 종교로서 그 신행은 자기 존재에 대한 대긍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이나 스님이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는 있지만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둘째, 불교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배우며 바르게 믿어야 할 것이다. 이 면에서 바르게 가르치는 쪽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셋째, 불교 교단은 남녀평등관에 입각해서 여성 불자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출가와 재가가 모두 포함된다. 출가의 비구니팔경법과 같은 것이 이 시대에 맞게 재고되어야 할 것이며, 비구니 할당제 같은 것을 만들어 종회 내에서 비구니의 역할을 확대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시주로서의 여성 불자의 역할은 인정하면서 도기로서의 여성 불자는 인정하지 않는 이중적인 규범 같은 것은 이제 없어져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넷째, 여성 불자를 위한 교육 체계를 세워야 한다. 특히 비구니 강원의 커리큘럼 속에 여성학과 같은 이 시대 여성에게 필요한 학문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 여성관의 바른 인식과 같은 것을 통해서 여성이 그 정체성을 회복할 때 기복적인 신앙 형태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여성 불자들의 발언이 표출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들이 소극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교단은 이를 차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게서는 "비구니가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거나 비방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보다 높은 계를 지니게 하기 위해서나 보다 높은 선정을 갖게 하기 위해서나 보다 높은 지혜를 갖게 하기 위해서 비구를 꾸짖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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