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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간화선 지침- 형상(形相)을 여의다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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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형상(形相)을 여의다

선(禪)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잊고자 함이요.

선(禪)은 기억해서 저장하면 안 되고, 기억된 것을 벗겨서 순간순간마다 자신에게 이미 있는 반복된 탄생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언어에 붙들려서 선(禪)을 해야겠다는 의도를 일으키면 이미 선(禪)에서 벗어난 것이다.

종이에 써놓은 콩과 바닥에 놓인 실제의 콩을 보고, 소가 종이에 써놓은 콩은 지나가고, 바닥에 놓인 콩을 먹더라는 것과 같이, 선은 언어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禪)은 이렇듯이 ‘시명 반야바라밀’이다

한번 선의 방향을 잡으면 오랫동안 화두(話頭)를 들지 않더라도 잠시만 화두(話頭)를 들어도 하루가 좋아진다.

그리고 생활과 인생이 바뀌어 진다.

많이 공부한다고 해서 인생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잠시만 공부하더라도 공부의 길을 찾아서 바르게 들어가면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번뇌 망상이 단번에 쉬게 된다.

이것이 간화선의 매력(魅力)이다.

그런데 다른 소승불교(小乘佛敎)나 위빠사나의 관법(觀法)은 step by step으로 나무의 잎과 줄기와 가지나 열매처럼 뿌리를 놓치기 때문에 궁극에는 붙들림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간화선은 처음부터 형상(形相)의 관법(觀法)을 놓아 내려 버리고, 부처가 경험(經驗)하고 조사가 경험한 것을 바로 질러 들어가는 공부이다.

위빠사나는 번뇌망상(煩惱妄想) 하나하나를 맛보면서 들어가므로 숨어 있는 번뇌망상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해 보았자, 엎어져 버리고 일회성(一回性)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위빠사나로 많은 공부를 하면 순간의 변화는 물론 일어나는데 경계 마디에 부딪치면 다시 변화 이전의 상태로 엎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간화선은 엎어지면 엎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난다. 땅에서 엎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번뇌 망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번뇌망상에 의지해서 공부에 들어가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이다.

무슨 일이든지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망상이 된다.

잘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놈이 중생심(衆生心)이다.

중생심으로 잘하려고 하니까, 중생심을 더하게 되는 결과가 된다.

참선(參禪)을 잘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면 이것이 바로 화두를 방해하게 된다.

따라서 이치적(理致的)으로는 맞는 말이기는 하나, 깨쳐서 견성(見性)하고 화두(話頭)하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을 일으키고 시작하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더욱 더 두텁게 포장되고 있다.

무엇이든지 잘 해야겠다고 해서 잘 되면 부처가 필요 없다.

왜냐 하면 하고 싶은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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