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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간화선 지침-중생심과 사량분별심(思量分別)의 자각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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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중생심과 사량분별심(思量分別)의 자각

조주가 석가모니의 ‘실유불성(悉有佛性)’에 대해서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에서 조주가 대답하기를 “무(無)” 라고 했는데, 엄연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말한 것은 중생생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러니까, 조주가 중생생각을 그치게 하고자 하여 “무(無)” 라고 한 것일 뿐이다.

없다는 그런 의미의 “무(無)” 가 아니라는 화두에 대한 분명한 의심(疑心)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疑心)이 생긴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의 작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깨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무(無)’ 해버린다.

이러한 ‘무(無)’의 본체(本體)는 불교의 선(禪)을 아는 사람이라면 없다는 그런 뜻에서의 무(無)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뭣고! 화두는 불교를 몰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무’자 화두는 특별히 불성(佛性)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생긴다.

그러나 이 뭣고! 화두는 그렇지 않다.

‘이 뭣고!’이든지 ‘무(無)’이든지 어느 것이나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 ‘바다’ 라는 한 곳으로 들어가듯이 어느 것이나 모두 부처님 바다로 하나가 되어서 들어간다.

그래서 어느 것이든지 상관이 없다.

그런데 편의상 “이뭣고!” 로 시작함이 쉽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떤 화두이든지 똑 같게 된다.

마조도일 스님의 견해에서는 ‘이 뭣고!’ 화두를 ‘마음도 아니다’, 중생도 아니다, 부처도 아니다, 라고 한다.

또한 몸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육조스님은 “숨 떨어지면 그대로 송장인데 어떤 물건이 이 몸을 끌고 다니는가?”

또한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등등의 화두를 궁구(窮究)하기도 한다.

이것을 생각으로 지어가면 틀린다.

중생생각이 있는 한 화두가 안 된다.

중생생각이 끊어져야 화두가 된다.

중생생각이 끊어지지 않으면 영원히 체험이 안 된다.

화두를 한다고 하면서도 중생 생각으로 마음을 만들어 간다.

이것이 병통(病痛)이다.

마조스님이 말한 ‘마음도 아니다’를 기억하지 말고, 마조를 잊고 스스로에서 일어나는 탐(貪), 진(嗔), 치(癡) 등등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 마음도 아니다.’ 라고 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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